모처럼 봄기운 물씬 풍기는 바다도 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나태함에 무뎌지려는 심신 상태를 일으켜 세우고 싶어 남도의 용아장성으로 불리는 만덕산으로 향한다. 촘촘하게 계획을 세워 떠나도 좋겠지만 아무런 계획 없이 훌쩍 마음 가는 대로 떠나도 좋은 시절이다. 그런 5월의 금요일 저녁에 고속버스에 올라 또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남도 답사 일번지라고도 일컫는 전남 강진에 내려 옥련사로 향한다. 기사는 옥련사가 비구니들만 있는 사찰이라고 말을 붙이더니 예전과 달리 만덕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이 늘었다는 말도 곁들인다. 도로를 사이에 둔 만덕산과 석문산을 새로 생긴 구름다리가 이어 주면서부터일 것이다. 그 구름다리로 인해 몇 개의 산을 더 연계하는 등산객들도 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덕산 기슭, 다산실학의 4대 성지
강진읍 덕남리 기룡마을 뒤 만덕산을 오르는 길에 옥련사라는 절이 있다. 여기가 만덕산의 들머리이다. 옥련사 담장을 끼고 벚꽃 화사한 길을 지나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옥녀봉이라고도 하는 필봉(해발 204.8m)을 올라설 즈음 천관산 위쪽으로 해가 떠오르면서 환하게 날을 밝힌다. 임천 저수지 뒤로 영암의 월출산도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게 펼쳐진 광활한 농토의 강진읍과 강진만 간척지가 보이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산자락은 아마도 부용산일 듯싶다. 깃대봉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철쭉 따라 걷다가 봉우리가 잘려버린 듯한 직벽이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구시골창봉이라고 적혀있는데 광물을 채굴하고 복원시키지 않은 채 내버려 둬서 심한 거부감이 인다.
오르내림의 고도가 심한 봉우리들을 몇 차례 오르내리다가 전망 좋은 암릉에서 숨을 돌린다. 향로봉과 천왕봉의 마루금이 드러난 월출산을 마주하자 수락산에서 도봉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자운봉을 중심으로 한 도봉산 정상 일대에서 좌우 주봉 능선과 포대능선으로 양팔 벌린 모습과 흡사하다.
“봉우리들이 어찌 저리 한양 도봉 같은고.”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가던 중 월출산을 보고 읊은 한 수 시구의 마지막 소절처럼 서로 닮았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정약용(1762~1836)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참으로 넓고 깊은 학식을 갖췄도다.”
성균관 유생 시절의 다산은 유교 경전에 관한 정조의 질문에 막힘없는 답변으로 극찬을 받는다. 왕의 사랑이 지극하다 보니 다산은 주위의 질시와 심한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소수파인 남인南人에 서학西學, 즉 천주교도로 몰려 그 도가 극히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를 중용하고 싶은데 주위의 의견이 분분하구나, 잠시 뒷전에 있다고 서운함을 갖지 말라. 곧 다시 불러 그대를 곁에 두겠다.”
그러나 정조는 다산에게 이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서기 1800년, 즉위한 지 24년 되던 해에 승하하고 말았다. 커다란 보호막이 사라지자 다산은 정약전과 정약종, 매부인 이승훈 등과 함께 죄인의 누명을 쓰고 이곳 강진으로 유배된다. 다산이 1801년 겨울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 사의재四宜齋라는 곳이다.
“귀양살이를 하기로서니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오. 후학이라도 양성하며 지닌 지식을 보람되게 써야 하지 않겠소.”
주막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아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머물렀는데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다산이 지은 이름이다. 다산은 할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제자들을 모아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 교재로 하여 가르쳤다.
지금 이 초가에는 ‘사의재’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고 마당 한쪽에는 주막 할머니와 외동딸의 모습을 형상화 한 주모상이 세워져 있다. 사의재 왼편에는 주막(동문 매반가)이 재현되어 파전과 동동주 등 토속음식을 판매하는 현대판 주막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의재에서 보은산 중턱에 자리한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강진의 여섯 제자를 교육하며 52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고 이후 여섯 제자 중 막내인 이청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2년 가까이 머물며 교육과 연구에 정진한다. 그리고 다시 1808년 봄, 다산은 도암면 귤동마을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1818년 유배 생활에서 풀리기까지 10여 년을 머문 곳이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이제부턴 이곳에서 사시지요. 월세도 안 받을 테니 편안히 계시면서 학문에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거처가 마땅치 않아 전전하던 다산에게 초당을 흔쾌히 내어준 건 해남 윤 씨 집안이다. 무려 18년의 유배생활 중 11년간 머물며 후진을 양성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 바로 다산초당이다. 그가 머물렀던 곳을 일컬어 ‘다산실학의 4대 성지’라 부르기도 한다.
유배 시절 다산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주지 스님과 차를 마시곤 했다는데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저술한 책들을 화두로 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이곳에서의 긴 유배기간 중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완성했다니 말이다.
귀인은 귀인이 알아보는 게 합당한 이치인가 보다. 다산도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훌륭한 분이지만 고산 윤선도의 집안 또한 속을 훈훈하게 하는 멋진 가문이 아닐 수 없다.
지독하게 고독했을 유배 중에 알아주는 이가 있어 살 곳을 내어주고 차 한 잔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산초당에 몸을 의탁한 정약용은 인생 후반에 닥친 불행에 좌절하지 않고 치열하게 자신을 거듭나게 함으로써 역사에 훌륭한 학자로 길이 남게 된다.
영암 월출산에서 방향을 틀어 화학산과 천관산을 살필 수 있고 완도 오봉산까지 눈에 잡히니 폐광산으로 인한 불쾌감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머리에, 가슴에 다산을 새기며 걸음을 옮겨 듬북쟁이봉(해발 301m)이라는 곳을 통과하고 다시 통샘거리봉(해발 337m)이라는 종이 문패가 걸린 나무기둥을 지나간다.
“이름들이 참 클래식하면서 까칠하군.”
작은 산인 줄 알았는데 바위도 많은 데다 바위 구간도 길고 거칠다. 소소하게 일던 바람이 멎으면서 햇살이 창창해진다. 월출산이 조금씩 멀어지고 대신 무등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우도를 둘러싼 바닷물결이 은빛으로 반사되며 아직 기상하지 않은 주변 섬들을 일제히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정상인 깃대봉(해발 408.6m)에 오른다. 정상석 옆에는 청렴봉이라고 적힌 작은 돌비석을 박아 눕혔는데 2020년 전남 공무원교육원 설립을 기념하면서 다산의 얼이 숨 쉬는 청렴 정신을 가다듬는다고 적혀있다.
아래로 이 지역의 천년고찰 백련사가 강진만을 굽어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동백나무 7000여 그루가 밀집하여 이른 초봄이면 절 주변을 붉고도 붉게 물들인다.
고려 무인 집권기와 대 몽고 항쟁 때 백련 결사 운동을 이끌어 민중에 기반을 두는 실천적 불교개혁에 앞장섰던 유서 깊은 명찰이 백련사라고 한다. 효령대군이 동생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백련사에 들어와 8년 동안 기거하면서 불사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서정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 김영랑의 생가도 멀지 않은 강진읍 탑동에 있으니 이 고장의 역사, 문화적 자취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부터 가야 할 석문산, 덕룡산과 주작산 그리고 두륜산까지 쭉 도열해 있는 걸 보고 그들을 사열하러 걸음을 옮긴다. 바람재 방향으로 오솔길 따라 느긋하게 걸어 마당봉을 넘어서며 많은 기암을 눈여겨보게 된다.
암릉 구간의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아 송송 솟는 땀을 닦으며 내려다보는 남해의 은물결이 자연스레 숨을 고르게 해 준다. 도로를 가로지른 구름다리가 석문산으로 연결된 게 보이고 거대한 죽순처럼 솟은 바위들이 우직하고도 경이롭다. 강진의 소금강이라고 칭할 만하다.
넓은 공터 사거리 바람재에서 모처럼 완만한 평지를 걷다가 다시 바위 사이를 비집고 건너뛰어 석문정과 구름다리를 진행 방향으로 잡는다. 만덕산을 내려서면 남도 명품 길인 바스락 길 구간이다. 이중 강진 바스락 길은 백련사에서 해남 대흥사에 이르는 37.4km의 구간으로 전남을 대표하는 걷기 길이라고 한다.
육산과 골산이 마구 섞이고 크고 작은 바위 봉우리들이 날을 세운 만덕산을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게 지나왔다. 폭 1.5m의 다리 양 끝에 하트 모양의 조형물을 설치하여 사랑과 만남이 이어지는 의미를 주어 ‘사랑 + 구름다리’로 칭한다. 다리 가운데 투명하게 판을 만들어 밑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현수교이다.
구름다리 너머로 석문산 암릉이 우람하다
다산의 형, 정약전과 그의 저서 자산어보
만덕산에서 볼 때 우람한 근육질의 석문산은 111m 길이의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역시 가파른 바윗길로 이어진다. 만덕산 중턱의 용문사를 쳐다보고 석문산 기암들 사이에서 숨은 그림처럼 탕건바위라는 걸 찾았는데 설명 팻말에 쓰인 것처럼 세종대왕이 익선관을 쓴 인자한 모습이다.
꽃이 물들어 덩달아 청량하게 물들고 싶었던 신록이 엊그제 지나니 석문산에도 더욱 기세 높여 짙푸름을 발산하는 녹음으로 발 닿는 곳마다 색감이 두드러졌다.
새들과 꽃봉오리의 재잘거림이 잦아들어 묵직한 고요가 담담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지만 푸름을 뚫고 솟은 암봉은 계절과 관계없이 그 표정에 변함이 없다. 어둠이라야 별이 더욱 반짝이는 것처럼, 구름을 그려 넣어 달빛의 오묘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석문산 수림들은 바위산의 근육을 보기 좋을 만큼 적당히 드러냈다.
전망대인 석문정 바로 앞의 매바위는 팻말에 쓰인 것처럼 매가 비상하듯 하늘을 향하고 있는 형상이다. 날카로운 주둥이는 금방이라도 먹이를 낚아챌 것 같다.
석문정 앞의 매바위를 지나게 된다
석문공원에서 1km를 걸어 올라와 소석문으로 가는 길에 이정표가 세워진 곳이 석문산 정상(해발 282m)인데 정상석은 없다. 덕룡산 아래로 석문 저수지가 보이고 너른 강진만이 시원하게 트였다. 맑은 도암천 사이로 협곡을 이루고 있는 석문산石門山은 해남의 남창과 완도에서 강진에 이르는 돌문 통로를 의미하는 명칭이라 한다. 정상에서 소석문으로 내려가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어 다시 만덕산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다산이 그토록 좋아하고 따랐던 둘째 형 정약전은 어떻게 됐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 등으로 1801년 정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된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목민심서 등 5백여 권을 집필했는데 정약용 스스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평한 정약전은 바다 생물에 대한 책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비롯 몇 권의 책만 집필했을 뿐이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해양생물 155종의 이름, 분포, 형태, 습성 등을 조사해 세밀하게 기록한 책인데 현대 해양과학자들이 이 책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귀하게 여기지만, 당시엔 비록 귀양살이를 하더라도 양반 출신이 비린내 나는 물고기를 만지고 해부한다는 건 상상이 어려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손가락질받을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약전은 그 일을 전혀 불편 없이 해냈다.
동생 다산만큼 대학자였지만, 출신에 관계없이 흑산도 주민들과 진정으로 어우러진 정약전은 어부들의 실생활에 득이 되는 자산어보를 집필하고 1816년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죽을 때까지 유배지인 흑산도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얼마 전에 세상에 선보인 이준익 감독은 영화 '자산어보'로 비운의 천재 정약전의 생애를 그려낸 바 있다.
두 천재 형제의 드라마틱한 삶을 떠올리면서 개울 위에 세워진 작은 다리를 건너 정자를 지난다. 이곳이 석문산에서의 날머리이자 덕룡산으로 오르는 들머리이다. 다시 올려다보는 석문산도 창백하고 뾰족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형태다.
다시 뒤돌아보면
아득했던 그 산들
가파른 등성이마다
거친 호흡, 굵은 땀방울
없어져도 그만일
짧은 흔적이겠지만
가슴 깊은 곳에
줍고 쓸어 담아
고이 여미고
가지런히 포개 놓게 된다.
눈에 가득 드리운 연초록 나뭇잎들
마음 가득 채운 무수한 낙엽길
내려와 다시 그 산 올려다보면
비록 어둠에 가렸어도
흔적마다 온통 그리움이다.
저만치 가다 또 한 번 온 길 되돌아보면
달빛 흐릿한 어둠마저
감동으로 일렁이는
가슴속 쿵쿵거림은
금세라도 눈물 되어
내 두 뺨 적실 것만 같다.
땅끝마을에 노을이 물들고 있다
때 / 봄
곳 / 옥련사 - 필봉 - 통샘거리봉 - 만덕산 깃대봉 - 바람재 - 마당봉 - 구름다리 - 석문산 - 소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