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의 대표적 관광지 화진포는 동해와 연접해 둘레 6km의 드넓은 호수에 주변엔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포구에는 기암괴석이 신비의 극치를 조성하고 있으며 얕고 청아한 수심에 곱디고운 모래로 덮인 백사장은 그야말로 명사십리明沙十里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이 별장으로 사용하다가 인민군 장교들의 휴양소로 사용했다는 가옥은 지금 안보 공원의 팻말을 붙여놓고 있는데. 가을과 겨울이면 철새들이 줄을 잇는 곳, 호수 주위의 풍광이 좋아 늘 수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여기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념 박물관으로서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또 그 아래로 이기붕 전 부통령의 별장이 있으니 당대 권력자들의 쉼터가 이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진포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언덕 위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쌓여있는 김일성 별장에서는 확 트인 동해가 내려다보인다. 역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이기붕 별장에 멋들어지게 뻗은 적송은 바라보기만 해도 우쭐한 느낌을 줄 만큼 크고 높다.
1920년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어 외국인 휴양소로 사용되었었다. 다시 독재의 대명사 자유당 시절, 제2인자였던 이기붕 일가의 별장으로 사용하다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그 별장에서 당대 지존의 자취를 더듬는다
조선 말엽 고종 12년 때인 1875년 황해도 평산의 전주 이 씨 가문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이승만은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 정치단체로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17년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 약소민족 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 만세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특유의 카리스마를 내세워 점차 정치적 색채를 지니기 시작한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 교포사회에서는 우남雩南 이승만을 따르는 우남파와 도산島山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의 대립 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노선에 분열이 생기기도 하였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 프란체스카를 아내로 맞이하고 1945년 광복이 되자 그해 10월 귀국하여 우익 민주 진영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독립촉성 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하며 1946년 6월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무투표로 당선된 데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공산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울였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노선을 취하였다. 6·25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조봉암 후보가 우세를 보이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한다.
국회에서의 표결에 의한 대통령 선거 방식을 직선제로 헌법 개정하여 대통령에 재선 되었다.
자유당이란 터전에서 더욱 다져지는 그들의 인연
예로부터 시인이며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화진포를 찾게 되면 풍류에 젖게 된다고들 한다. 호반을 감싸는 호젓한 기운이 유유자적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와 절로 시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리라.
호수 주변을 병풍처럼 에워싼 청정 솔숲에 노란 금계국이 군락을 이루고, 호반 도로에는 붉은 해당화가 곱게 피어 한껏 운치를 더하는데 어찌 시심이 동하지 않으랴.
‘가을동화’라는 드라마 촬영지라고 했던가. 영화 속 그림 같은 이곳을 깊게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스모그처럼 탁한 안개가 끼는 걸 보게 된다.
이승만 그리고 김일성, 남과 북으로 나라를 양분한 실세들의 모습이 보이고 이기붕의 아내, 박 마리아와 아들 이강석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탕, 탕! 몇 발의 총성이 들리면서 그들의 별장은 혼미한 역사 속으로 스며들며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1945년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비서,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국방부장관,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 민의원 의장을 거쳐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된 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는 소나무처럼 승승장구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선 사람. 그가 만송 이기붕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범석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 2년 후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를 축출하고 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면서 실권을 장악한다.
민의원 의장이 된 후,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 부결된 사안을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기상천외한 산술계산법으로 번복시켜 가결로 강행 처리하였다.
1959년 6월 29일. 자유당은 정·부통령 지명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함으로써 본격적인 선거 대비 태세에 돌입하였다.
“이대로 개표하면 선거에 지고 맙니다.”
선거 결과를 분석해보니 정권 유지에 승산이 없음을 알고, 이기붕의 자유당 정권은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악수를 둔다.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지휘 아래 1년여에 걸쳐 치밀하게 부정선거를 준비하더니 전국 경찰의 주요 간부 대다수를 맹목적 충성 인물로 교체하였고 이정재를 필두로 그의 휘하에 있는 유지광, 이석재 등 정치깡패를 동원해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해 상대편을 중상모략하거나 그 내부를 교란하기 위한 흑색선전의 의미, 매터도matador란 용어를 우리나라 선거판에 등장시킨 일등 정권이 자유당이었다.
1960년 1월 29일,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자유당 정권은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던 정·부통령 선거를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한다고 공고한다.
“이번 선거는 부통령 선거가 관건이야. 이기붕 후보께서 당선돼야만 해.”
“그렇긴 하지만 야당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대응책을 마련하란 말이야.”
그해 2월 15일 조병옥이 미국에서 서거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자, 선거의 관심은 대통령 유고 시 승계권을 갖는 부통령 선거에 모아졌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사망으로 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에게 선거 민심이 쏠리는 걸 자유당은 방관할 수 없었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정부·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연일 거듭된다.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시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 발표 등 가공할 정도의 부정이 감행되었는데 바야흐로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은 3·15 부정선거가 발발한 것이다.
모자람만 못한 넘침의 말로, 그 비참한 최후
3·15 부정선거 결과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각각 88.7%와 79%의 득표로 정·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다수 국민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무효 주장에 호응하여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지더니 결국 4·19로 이어졌다.
“아버지, 이젠 다 끝났어요.”
“강석아, 이를 어쩌면 좋겠니.”
“어머니, 이쯤에서 모든 걸 마무리하는 게 우리 가족에게 최선일 듯싶어요.”
4·19 혁명으로 그예 부통령을 사임하고 피신해있던 이기붕 일가는 당시 육군 장교였던 아들에 의해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최후를 맞고 만다.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 마리아에 의해 이승만과 양자의 연을 맺은 그들의 장남 이강석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허리춤에 찬 권총을 빼 든다.
“탕!”
“타앙!”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지 않던가. 아버지, 어머니, 동생 그리고 저 자신…. 전 가족이 자살하는 불행한 말로로 그들의 가문은 열흘 붉다가 지는 꽃이 되고 말았다.
이 어찌 한 가문의 불행에 그치고 마는 일이던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헌법을 제정한 지 겨우 열두 해, 우리 민족의 앞날에 얼마나 많은 시련이 거듭될 것인지를 예고하는 어두운 총성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건국 첫 대통령의 하야下野.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을 시도하다가 결국 이승만 정권마저 붕괴되고 하야하더니 급기야 노회한 대통령은 파란 눈의 영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승만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독재정치 및 정경유착 등 집권 내내 말단 정치의 표본을 보였다. 불법 개헌과 선거 부정 등으로 국민의 위장된 동의를 억지로 끌어낸 하급 정권을 씻어내지 못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던 것일까. 그 후로도 우리나라 정치는 고만고만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단 한 차례도 존경받는 대통령을 두지 못하는 서글픈 역사를 이어간다.
울창한 해송 사이로 보이는 바닷가에 수많은 피서객이 한껏 여름을 즐기고 있다. 화진포를 벗어나 그 일대를 다시 돌아보는데 그들의 별장에 자꾸 시선이 머문다.
때때로 절대 권력자들의 그럴싸한 별장이기보다는 죽은 자들의 혼이 암울하게 서린 가옥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너무도 가까이에서 지냈던 이들의 흔적이 훗날에까지 지척에 머물러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아 되레 씁쓰레한 기분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