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_3

지존의 죽음

by 장순영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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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

<차 례>


지존의 죽음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대통령의 여자

유일한 용의자

신데렐라와 사탄의 시녀

오누이와 동거남

딜, 은밀한 거래

유착

동반자

아리아드네의 실

송곳 살인의 재현

익명의 제보

상사화

이중 복선

역린

고독한 도주

서러운 해후




지존의 죽음



3.


‘세컨드 레이디’를 처음 화두로 올리고 불과 일주일 만에 계약이 이루어졌다.

출연자들의 섭외를 마치자 영화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웬만한 영화의 평균치에도 미치지 않는 예산, 생각보다 훨씬 적은 제작비가 소요되었기에 정민은 느긋했다.

더구나 남 교수가 촬영 현장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편집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보수 없이 총연출자의 역할까지 맡은 셈이었다.

규태는 차분하게 정민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제동을 걸지 않고 그가 하는 말을 다 듣기로 했다. 사건과 관계가 있건 없건 능변인 그의 얘기는 우선 재미가 있었다. 정민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국내 최고의 영화평론가이며 영화에 대한 대중 선호도를 구석구석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남현태 교수의 노하우 덕분에 세컨드 레이디는 시사회부터 들끓기 시작했지요.”

금상첨화로 정치권 특히 여당과 청와대에서 잠시 보였던 민감한 반응이 오히려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작용해 주었다.

영화는 상영과 동시에 문화 이슈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기존의 흥행 기록을 속속 깨뜨렸다.

‘세컨드 레이디’를 관람한 다수의 관객은 영화관을 나와서까지 마지막 부분의 삽입곡 레퀴엠requiem의 슬프고도 처절한 선율에, 그러면서도 장중한 음향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남 교수의 요청으로 빠른 박자의 레퀴엠이 다시 느릿하게 바뀌며, 영상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사실주의적인 내재음內在音을 최대한 줄이고 음속의 완급을 적절히 조절한 리듬이 관객들의 정서를 영화 속으로 몰입시켰다.

표현에 적극적이고 상징적 의미들에 주력하는 습성 역시 남 교수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그의 입김이 다분히 배어서 만들어졌다.

음악평론가인 S 대학의 이숙희 교수는 영화의 줄거리를 묘사하면서 주제음악을 ‘세컨드 레이디’만큼 적절하게 삽입한 예를 본 적이 없다고 호평했다.

여주인공의 소용돌이치는 심리상의 격변과 곧 치닫게 될 비극이 관객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는데 음악이 충분한 역할을 했다면서 박하기로 유명한 영화평론가 오성천 씨도 찬사를 보냈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대다수는 실제로 역대 대통령 중 누군가의 실체를 영화의 내용에서 발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영화 밖에서도 자신이 본 영화에 지속해서 몰입하게 되는 건 관객의 심리를 염두에 두고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게끔 연출한 덕분이었다.

실제로 영화는 근거도 없이 K 전 대통령과 미스코리아 진 출신인 N 씨의 스토리라는 루머로 번져 또 다른 얘깃거리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세컨드 레이디’는 영화 체험의 커다란 심리 요소인 파이 현상과 잔상효과를 톡톡히 담아낸 영화라면서 정민은 어려운 말로 긴 얘기를 마무리했다.

결국, 현재까지 1,800만 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국내 영화 사상 초유의 히트를 치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정민과 현태 두 사람은 사업뿐 아니라 골프, 해외여행 등 생활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며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세컨드 레이디엔 오수연 씨가 아니라 현소영 씨가 여주인공이었잖습니까?”

정민의 얘기에 조용히 귀 기울이던 규태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정민은 마신 물컵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랬죠. 세컨드 레이디의 연출을 맡았던 우리 유광진 감독이 오수연을 오디션까지 시켰고 꽤 만족스러워했는데 웬일인지 남 교수님은 촬영 직전에 현소영으로 배역을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하기는 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어요. 작품을 완벽히 하기 위해서라는 데야….”

현소영은 재학 중에 M 방송사의 신인 탤런트로 발탁되기는 했지만, 영화나 방송 출연 경력이 전혀 없었다. 간간이 조연급으로 대학가 연극무대에 섰던 게 고작인지라 무명의 신인이기는 오수연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작가의 입김이 크더라도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영화계의 현실에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규태가 물었다. 정민은 빙긋이 웃다가 덧붙였다.

“저도 나중에 알았지만, 현소영은 졸업 전부터 남 교수님과 깊은 관계였더군요.”

“그랬습니까?”

“그런 걸 미리 알았다고 해도 여배우가 교체되는 걸 반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촬영이 시작된 후라면 모르지만요.”

“오수연 씨의 실망이 컸겠는데요.”

규태는 오수연이라는 아가씨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다. 사건 후 얼핏 보았지만, 현소영에게 뒤지지 않는 미모다. 그녀가 여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 규태는 잠시 ‘세컨드 레이디’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엔 그랬지요.”

정민의 대답에 규태는 그녀의 심정이 참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성공했으니 더욱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았다.

“워낙 낙천적이고 착한 아가씨인지라 금세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더군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박 사장님이 오수연 씨를 알게 된 거였군요.”

그녀가 금세 밝은 모습을 되찾는데 박 사장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군요. 그런 뜻으로 규태가 말하기도 했지만, 정민도 그렇게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그게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수연이와 특별한 관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은 특별한 관계? 특별한 관계란 어떤 관계일까. 그러나 규태는 그 관계의 내용을 묻지는 않았다. 물 한 잔을 더 마신 정민이 답변을 보탠다.

“수연이는 배우로서의 재능도 갖췄지만, 시나리오 작가가 지녀야 할 잠재력 또한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애가 원하면 배우로든 작가로서든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호감이 가면서 생긴 생각들이지만요.”

정민은 수연과 가까워지면서 그녀가 얼굴이 알려져 스캔들로 인한 구설수의 사정권 내에 있는 배우로 크기보다는 작가로서 우뚝 서기를 원했다.

영화 사업의 성공은 곳곳에 널려 있는 스타보다는 단 한 가지라도 훌륭한 작품만 있다면 성공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배우와 하나의 소중한 작품은 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자의 비중이 크다.

그렇게 비유한 정민의 설득을 수연이가 받아들였고, 지금은 배우의 길을 거의 포기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면서 정민은 오수연과의 관계 설명을 마쳤다.

규태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지어졌다. 대략 특별한 관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여자로서 옆에 두고도 싶었지만, 수연이한테 명작을 생산해내게 하고 싶은 욕심이 강했지요. 그 애를 통해 투자 욕구가 동했다고나 할까요. 전, 죽을 때까지 영화인이고 장사꾼이라….”

정민이 묻지 않은 속내까지 털어놓자 규태는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스몄다. 조사나 신문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일개 말단 형사에게 지나칠 정도로 장황하게 배경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자신의 전문분야를 설명하는 자아도취적 언급이 없지 않았으나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 또한 적지 않았다. 중간에 그의 아내가 병실 문을 열기도 했는데, 정민은 오히려 아직 얘기 중이라며 아내를 나가 있게 했다.


“이 형사님께서 이 사건 담당 수사관이시니까 더욱 빠른 해결을 바라는 마음으로 솔직하게 또 소상히 말씀드린 겁니다.”

정민은 다소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서 말을 맺었다.

“박 사장님의 심정, 알고도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요. 네 분의 그날 여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정민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 주변에선 아무도 모르지만, 다른 세 사람은 어떨는지 알 수 없지요.”

“네, 그렇겠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너무 피곤하게 해 드렸습니다.”

규태는 아무렇게나 뻗친 덥수룩한 머리숱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실 앞까지 나온 정민은 규태에게 악수를 청하며 부탁했다.


“수고해 주십시오. 꼭 잡아주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규태는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왔다. 참고인을 만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곧바로 느낌을 정리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었다.

그러나 오늘은 ‘세컨드 레이디’의 장면들만 그득하게 머리를 채운다. ‘세컨드 레이디’를 포함해서 남 교수가 만든 영화들, 정확히는 그가 각본을 쓴 서너 편의 영화들이 방화의 장르를 선도하는 경향이 일기 시작했다.

‘남현태 브랜드’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중에 그가 죽고 말았다. 문득 누군가가 그의 영광을 시기해서 생긴 일처럼 느껴진다.


- 죽어서 그의 이름은 더욱 빛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처럼 훌륭한 영화인의 죽음은 당사자한테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규태는 막 박정민 사장한테서 영화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나자 마치 전문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웠다.

1층 로비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정현숙이 보였다. 그냥 가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규태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모님! 오래 나와 계시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말씀 충분히 나누셨나요?”

“예, 덕분에 수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현숙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병실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40대 초반 여성의 걸음치고는 무척 경쾌하다고 생각하면서 규태는 병원 현관의 회전문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그녀가 출연했던 그 영화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라의 샤워 장면 후에 이어진 정사 장면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최고의 남자 배우였던 황세현과 정현숙의 베드신은 실연實演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기까지 했었다.

밖으로 나와 잠시 멈칫한 규태는 병원을 다시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정현숙을 처음 볼 때부터 들기 시작한 의구심이었다.

결과적으로 외도를 하다가 발각된 남편의 아내가 아닌가. 그런 아내치고는 얼굴에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고 세상이 들먹거릴 조짐까지 보이는데.

- 그 정도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건가. 그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걸까.

미심쩍기는 했어도 사건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여긴 규태는 병원 쪽을 한 번 뒤돌아보았다. 정현숙의 뒷모습이 막 모퉁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 그래도 속은 전혀 그렇지 않겠지.


규태는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수연과 통화를 하며 올려다본 잿빛 하늘에서 다시 눈발이 흩날린다.

오수연과 통화를 마친 규태는 미리 입력해둔 현소영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30분이면 충분합니다.”

병원에서 나와 오수연을 먼저 만나보기로 작정했던 규태는 계획을 바꿔 현소영의 아파트가 위치한 신림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화를 받은 오수연이 자기가 경찰서로 직접 출두하겠으니 시간만 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시원시원한 사내를 연인으로 둔 여자답게 그녀도 이를 데 없이 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수연에게 오후 5시까지 강남서 강력팀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규태는 현소영과 방문 약속을 했다.

현소영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목소리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아직 환자라는 사실도 잊고 규태의 입에서 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온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노총각을 마냥 달뜨게 한 것이다.

- 이렇게라도 해서 팔자에 없는 여복을 충족시켜야지, 어쩌겠어.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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