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산 9
최고봉 만경대와 그 품속 애기봉의 모습처럼 운악의 암벽들은
저마다 땀구멍처럼 비좁은 공간을 비집고도 푸릇푸릇 광채 뿜는
소나무를 붙들어주고 소나무는 절반이나 기울어진 몸으로도
하늘을 잡으려고 가지를 내뻗고 있다.
단풍 물 빠졌다 해서 가을 서정이 시들해질까. 중추의 화려함은 많이 사그라졌지만, 자연은 때를 가리지 않고 나름대로 당시의 분위기를 한껏 연출해낸다. 늦가을 낙엽 수북한 운악산은 계절의 정점과 관계없이 수더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로 옛 추억에 잠기게끔 감성을 자극하고 함께 하는 이들과 살가운 정을 더욱 귀히 여기게 만든다.
비장했던 역사의 현장, 궁예 성터
이번 운악산은 포천 쪽의 운주사를 들머리로 잡았다. 가평의 현등사를 기점으로 오르는 길을 오늘은 내리막 코스로 잡은 것이다. 그 길에 횃불 산악회 멤버인 인섭, 태영이 두 친구와 후배 계원, 기준이랑 다섯 명이 동행한다.
가평 화악, 서울 관악, 파주 감악, 개풍 송악산과 함께 경기 5 악의 하나로 꼽는 운악산은 특히 산세가 뛰어나 경기의 금강이라 불린다. 깎아지른 절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가파른 바윗길을 오르노라면 비록 절정의 자태가 아닐지라도 그 수식어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숨을 고르고 다시 오르지만 계속되는 바위 구간은 경사마저 급하다.
“목 좀 축이고 가자.”
무지치폭포를 아래로 두고 약수터에 이르러 목을 축이고는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정상을 향한다. 1100여 년 전 후삼국 시대,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거센 바람을 일으킨 궁예는 이곳에 둘레 2.5km의 산성을 쌓았다. 깊은 골짜기와 기암절벽을 잇고 또 이어 쌓은 산성에서 궁예는 왕건에게 맞서 건곤일척의 전투를 치른다.
신라 왕권 다툼의 희생양으로 강보에 싸인 채 던져진 아이는 유모에 의해 생명을 건진 후 승려의 신분으로 다시 태어났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겨우 저런 애송이한테 당하다니.”
태봉국의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 했건만 이 자리에서 반년을 버티다가 왕건에게 패하고 만다. 궁예의 마지막 전조를 보인 여기 궁예 성터의 성벽은 대다수 허물어져 산비탈 아래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운악산 비탈길에서 숨이 차다 하여 고개 젖히지 못하고 오르거나, 미끄러운 내리막길 발 디딤에만 신경 쓰다 보면 이곳이 비장했던 역사의 현장임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달랑 궁예 성터라 적은 노란 아크릴판 조각 하나가 걸려있으니 말이다. 마치 역사는 과거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미 천년도 더 지난 고린내 풍기는 얘기일 뿐이라고, 여긴 그저 등산로의 한 구간이고 그 표식을 걸어놓았음이라고.
“애기봉에 들렀다 갈까.”
성터에서도 길게 고도를 높여 올라가게 된다. 정상인 서봉을 앞둔 갈림길에서 왼쪽 100m 거리의 애기봉을 들러보기로 한다. 따사로운 양지에서 엄마한테 업힌 아가가 푸근히 잠들어 있다.
여기 애기봉에서 어머니 품에 잠든 아가의 모습을 그렸다지. 최고봉 만경대와 그 품속 애기봉의 모습처럼 운악의 암벽들은 저마다 땀구멍처럼 비좁은 공간을 비집고도 푸릇푸릇 광채 뿜는 소나무를 붙들어주고, 소나무는 절반이나 기울어진 몸으로도 하늘을 잡으려고 가지를 내뻗고 있다.
그리고 마저 올라 닿은 서봉(해발 935.5m)의 공터에는 이미 많은 등산객이 가을 운악산을 즐기고 있다. 동봉(해발 937.5m)까지도 가는 가을이 아쉬운 양 여기저기서 만추를 카메라에 담는 중이다.
온산 붉게 물들인 가을 대향연의 시기는 지났지만 보듬어보노라면 산에서는 계절이 돌아가는 길목도 모퉁이가 아니며, 시간이 다 흐른 후의 파장도 전혀 있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인생사 떠남과 보냄, 다시 만남의 차이 또한 고개 갸웃거려 생각 바꾸면 그다지 다를 게 없지 않으리라고 여겨진다.
‘꽃 같은 봉우리 높이 솟아 은하수에 닿았고……’
양사언의 시에서처럼 구름을 뚫을 듯 바위 봉우리들이 높이 솟구쳐 있다 하여 운악雲岳이라 명명했단다. 운악산 석비를 보니 산허리 휘감아 운무 흐르는 날이었다면 거기 새긴 시구에 딱 부합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운악산 만경대는 금강산을 노래하고
현등사 범종 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백년소 무우폭포에 푸른 안개 오르네
우리, 그대에게 왔으니 다시 돌아가더라도 우리 인연 진한 흔적 서봉에 남아있을 것이요, 그대 우리 받아들인 정표 동봉에 걸어둘 터인즉 시시때때로 서리 내리고 눈 쌓이더라도 다시 오거들랑 현등사 풍경 청아하게 울려주어 우리 맺음은 달라짐 없음을 미리 확인시켜 주시게.
떠나서도 어느 날 별안간 재회하게 될 운악산이다
제 몸 살라 영혼 깃들었던 가을 잎
활짝 펼치었다 슬금 오므라들더니
진통 떨치려 함인가, 스스로를 떼어내네.
은빛 엷은 햇살 풋풋하여
만추 만경대와 하늘 사이 고즈넉 능선길
눈에 차는 것마다
깊은 오수에 빠진 듯한데
아아, 나만 그런가 보다.
가슴 뚫어질 듯
애수에 젖어드는 건.
내려가는 길인데 다시 바윗길을 오르게 된다. 만경대의 암릉에서 사방 휘저으며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솔솔 하늬바람이 일어 폐부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면서 두루 보게 되는 운악산 단애와 기암들, 그리고 거기 박힌 소나무 분재들이 자꾸만 허리춤을 잡아끈다.
강건하고도 꼿꼿하게 솟은 미륵바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꽉 들어찬 충만감을 심어준다. 여러 갈래 세로 주름을 세운 병풍바위는 운악산의 존재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운악산의 상징이랄 수 있는 수직 병풍바위의 깎아내린 절벽은 그 아찔한 느낌이 여기 왔던 이를 다시 오게끔 잡아끄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매 계절이 그러할 진데 본래 색깔을 아쉬워하는 만추 단풍이 매달려 있음을 보았을 때면 오죽하랴 싶다.
능선과 암릉, 내리막길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시 만날 것을 예정하게 만든다. 선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된 총각으로 의인화한 눈썹바위를 지나고 포장도로에 이르면 거기 현등사가 있다.
가평군의 향토 문화재 제4호이기도 한 현등사는 서기 527년에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그로부터 13년 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교를 전하기 위해 온 승려 마라 하미를 위해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의 도학자인 서경덕의 부도가 있고, 임진왜란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국교 교섭에 대한 선물로 보낸 금 병풍 한 점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6·25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
“불에 타서 소실된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갖고 있겠지?”
“금수산 김일성 궁에 있지 않을까.”
침략자가 보낸 물질에 대해 터무니없는 추측을 하며 경내를 빠져나온다. 현등사를 나와 다시 올려다본 운악산이 한 마디 넌지시 건네준다. 그 덕담이 속을 감미롭게 한다.
“자네들과 난 오래도록 벗으로 지내게 될 걸세. 그러니 자주 찾아주게나.”
지나가는 것은 없고 오직 남겨지는 것이 있을 뿐이며 다시 회귀할 약속 또한 분명하게 새김으로써 늦가을 해거름 내리막길에서도 진한 해후를 상념 하게 된다.
어스름 노을의 날머리에서 뒤돌아본 운악산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배웅하며 아쉬워하는데 그 표정에서 어느 날 별안간의 재회를 읽게 된다. 그런 운악산에서 깨끗한 향기가 뿜어 나는 걸 느낀다.
순결하여 무척이나 감미로운 향기여서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때 / 늦가을
곳 / 포천 운주사 - 궁예 대궐터 - 애기봉 - 운악산 서봉 - 동봉 - 만경대 - 눈썹바위 - 가평 현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