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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아리수 밟으며
검단산에서 용마산으로

경기도의 산 20

by 장순영

계단을 올라 살얼음 둥둥 뜬 한강을 내려다본다.

한적한 미사리 조정경기장은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보인다.

고도를 올릴수록 바람이 몰아쳐

나무에 붙었던 설분이 세차게 나부낀다.



검단산이 있는 하남시는 경기도 중심에 위치하여 서울 강동구 및 송파구와 접한 서울의 동쪽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신석기 문화유적에 청동기 무문토기가 발견되었고, 미사동에서는 선사 유적지와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덕풍동에서는 돌도끼, 숫돌과 화살촉, 대팻날 등이 출토되었다.

또 몽촌토성 등 삼국시대 유물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어 역사유적 관광지로 관심이 높은 지역이다. 이처럼 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시대 삶의 유적 층을 발견하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백제 한성 시대 때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으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 검단산鈐丹山인데 백제 때 고창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이곳에 은거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하남시 동쪽 한강 변의 하산곡동에 위치하여 한강을 사이에 두고 예봉산, 운길산과 마주하고 있다.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유입되는 물품들을 이곳 검단산 입구의 창우동倉隅洞에서 보관하였는데 창고가 있던 지역이란 의미를 지닌 이 동네가 산행기점이 된다.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


사는 곳에서 가까워 더러 찾는 검단산이다. 들머리는 대체로 교통이 편한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와 산곡초등학교, 그리고 반대편 팔당호 배알미리 쪽이 있다. 오늘은 창우동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기점으로 하여 유길준 선생 묘역을 지나 검단산에 오른 뒤 용마산을 거쳐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로 하산하는 종주 코스를 잡았다.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뒤편 주차장 입구의 두 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른쪽은 현충탑 아래 노상주차장을 통해 오르는 길이다. 등산로 초입은 길도 넓고 완만하며 등산로 양옆으로 높이 뻗어 도열한 잣나무들이 하얗게 입김 뿜어내는 겨울 방문객들을 환영한다.

약간의 경사를 걸어 유길준 선생 묘역에 이른다. 잔설이 묻은 그의 묘비가 오늘따라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이 아비는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마라.”


그가 죽으면서 자식들을 앉혀 놓고 남긴 유언이다. 식민지하에서 눈을 감은 지식인의 고뇌를 엿보는 유언이지만 자손들은 묘비를 세웠다.

1885년, 유럽의 도시에 특이한 옷차림의 동양 청년이 만나는 유럽인들에게 서툰 영어로 뭔가를 묻기도 하고 메모를 하면서 돌아다닌다. 그는 빠듯한 여비를 아껴 쓰면서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단순 관광이 아닌 기행에 열중한 유길준은 일어와 영어로 말하고 쓸 줄 아는 첫 세대였고, 국한문 혼용의 문체로 저술을 남긴 지식인이며 유럽을 최초로 기행 한 조선인이다. 그해 12월 고국으로 돌아온 유길준은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의 동료들이 갑신정변에 연루된 개화파라고 하여 바로 연금을 당했다.

연금 생활 중 자신이 보고 겪은 미국과 유럽의 문물제도를 소개한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을 집필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과 유럽 기행문으로 꼽힌다. 그 후 유길준은 백성들에게 교육이 보급되지 못해 개화하지 못하고, 산업이 일어나지 못해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이 있다고 여겨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유길준 묘소 옆으로 경사 급한 계단이 이어진다. 약수사거리 공터에서 숨을 고른다. 무척 차가운 날이다. 바람까지 불어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51. 검단산 정상 아래 전망대에서 보는 팔당호도 얼어붙었다.jpg 검단산 정상 아래 전망대에서 보는 팔당호도 얼어붙었다


밧줄 울타리를 친 돌계단은 언 곳도 있고 눈이 굳은 곳도 있다. 계단을 올라 살얼음 둥둥 뜬 한강을 내려다본다. 한적한 미사리 조정경기장은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보인다. 고도를 올릴수록 바람이 몰아쳐 나무에 붙었던 설분이 세차게 나부낀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다시 고도를 높인다. 휴식처인 전망대에서는 아래로 팔당호와 멀리 용문산에 눈길만 주고 곧바로 정상으로 향한다. 경사 구간과 능선을 따라 검단산 정상(해발 657m)에 이르자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등산객이 모여 있다.

날은 차지만 모처럼 시계가 트여 북한산 인수봉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는 조금도 물살의 흐름이 없다. 하얗게 눈 덮인 광주시와 하남시 일대를 묵연히 내려다보노라니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삼국은 신라가 아닌 백제가 통일 대업을 이룰 수도 있지 않았을까.”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위례성이 있던 검단산이다. 이 일대는 백제 시조 온조왕 이래 13대 근초고왕에 이르기까지 약 370여 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왜국과의 무역을, 북으로는 영토 확장을 위한 북진정책을 통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면서 역사상 최대 영역을 확보했다. 신라와의 동맹도 강화하여 백제는 한반도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했던 백제가 21대 개로왕 때에 이르러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만다. 역사학자들은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다 내부의 정치적 결속이 와해한 걸 그 주원인으로 꼽지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파견한 승려 도림의 계략에 넘어가 패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신임을 얻은 도림이 대대적인 토목공사 등을 부추겨 고구려 침공에 대한 대비를 소홀하게 했음을 패배의 요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이후 백제는 도읍을 사비성,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로 옮기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개로왕과 관련하여 검단산은 삼국사기 열녀전에서 전하는 도미 부인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평민인 도미의 아내는 아름답고 행실이 곧아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개로왕이 도미의 아내를 탐냈다.


“그대 부인이 정절 하다고 하지만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도미를 불러 개로왕이 이렇게 말하자 아내를 신뢰한 도미가 부인했다.


“제 아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죽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목숨을 건 내기가 벌어졌다. 개로왕은 도미를 잡아두고 가까운 신하를 왕으로 변장시켜 도미의 아내에게 보내 합방할 구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도미의 아내는 한술 더 떠 몸종을 단장시켜 방에 들여보낸다. 후에 속았음을 알게 된 개로왕은 도미의 두 눈을 빼내고 그의 아내를 범하려 했다.

도미의 아내는 궁을 탈출하였으나 강가에 이르러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실의에 빠져 통곡하였다. 그때 조각배 한 척이 떠내려와 올라탔는데 배가 천성도에 이르자 눈먼 도미가 거기에 살아있었다. 극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갖은 어려움 끝에 고구려 땅으로 건너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왕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려 했던 도미 부인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까지 전해 내려와 세종대왕은 삼강행실도 열녀의 표상으로 삼도록 지시하였다.

또 박종화의 단편소설 ‘아랑의 정조’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이 설화의 파급이 지금까지도 재미있게 전개되고 있으니 경기도 하남시와 충남 보령시에서 도미 부인이 살았던 곳이 각각 그들 지자체 관할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아마도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절대권력에 맞서 부귀영화 대신 지순한 사랑을 택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훈훈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검단산을 등지고 용마산으로


52. 용마산 비탈의 고사목이 쓸쓸해 보인다.jpg 용마산 비탈의 고사목이 홀로 산객보다 더 쓸쓸해 보인다


백제의 흥망과 도미 부인의 사연을 뒤로하고 용마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정상에서 계단을 내려서 능선을 따라 그대로 산곡초등학교 방향으로 나아간다. 용마산 능선부터는 인적이 뜸하다. 산곡초교로 내려가는 갈림길까지가 검단산이고 이제부터는 용마산 능선을 걷게 되는 것이다. 오후가 되어서 해가 구름을 벗어나면서 추위는 많이 누그러졌다.

용마산으로 가는 길에 두리봉 또는 고추봉이라고도 부르는 570m 봉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하남 공영차고지이다. 검단산에서 2.1km를 지나왔고 용마산을 1.62km 남겨둔 지점이다. 두리봉이 한 발짝씩 더 뒤쪽으로 물러서는 걸 확인하며 용마산에 근접해간다.

몇 번의 굴곡을 오르내렸다가 다시 올라 자그마한 정상석이 세워진 용마산(해발 595.7m)에 도착한다. 이곳의 조망도 매우 뛰어난데 검단산 정상과 달리 겨우 서너 명의 등산객과 마주쳤을 뿐이다.

용마산에서의 하산로는 눈이 쌓였다가 녹으면서 간혹 미끄럽기는 해도 무리 없이 내려갈 수 있는 평범한 길이다. 갈림길이 나오면서 굴다리 낚시터와 은고개 버스정류장을 선택할 수 있다. 어느 곳으로든 광주시의 차량 도로로 이어지게 된다.

꽁꽁 언 낚시터를 지나고 중부고속도로 아래로 몇 개의 굴다리를 통과해 43번 국도의 엄미리 버스정류장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너른 고을, 도자기의 고장 광주에 어스름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서 기온은 더욱 떨어지는 듯하다. 자고로 겨울 산은 그곳이 어디든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낮 짧은 겨울인지라 무리하지 않게 산행코스를 잡게 되고 만일에 대비한 준비물을 갖추는데도 신경을 쓰게 된다.



때 / 겨울

곳 / 창우동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 유길준 선생 묘소 - 전망대 - 검단산 - 산곡초교 삼거리 - 두리봉 - 용마산 - 엄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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