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산 27
깨지고 멍들면서 예까지 온 거 아니었던가.
산이나 인생이나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얼음물 한 모금에 씻기는 게 갈증 아니던가.
지나고 나면 죄다 한바탕 봄 꿈같은 게 사는 일 아니었던가.
시월 초순은 가을이라고도 할 수 없다. 무성했던 초록만 갈색으로 바뀌고 있을 뿐 막바지 더위는 건조한 햇살에 심술까지 실어 기승을 부린다.
오후 세 시, 북한산 아래 불광동 대호아파트 입구에서 세 사람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고 다섯 산을 잇는 첫 들머리로 걸음을 내디딘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는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이, 한을 품게 해서 불행의 골로 이끌게 하는 이, 모두 그 사람과 매우 가까운 데 있다. 그 전자에 해당하는 이와 함께하는 길은 그 길이 제아무리 멀어도 멀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5 산 종주를 별러왔다는 후배 은수와 두 번째 종주 산행을 하게 되는 친구 병소, 이번엔 그들과 함께이기에 긴장되지도, 외롭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함께’라는 부사가 풍기는 푸근함과 넉넉함, 세 번째 5 산 종주는 나 홀로였던 이전과 달리 호기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이번에 한 번만 더 함께 하자.”
세 번째의 5 산 종주에 동반해달라는 친구 병소의 제안이었다.
“이 기회에 나도 재충전하는 기회가 되겠지.”
평소에 다듬어진 친분은 극한에 처했을 때도 다름없이 그 친분의 진가를 발휘한다고 믿어왔다. 극한에 이르러서야 친분을 찾는 건 소경이 이정표를 더듬는 것과 다른 바 없을 것이다. 숱한 세월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함마저 무뎌졌었다. 늘 주기만 하고 베풀기만 했던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달리 많지 않았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루비콘강에 배를 띄운 셈이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지만 한여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뜨겁고 건조한 날, 그렇게 우린 무박 이틀 약 50km의 대장정에 오른다. 족두리봉 하단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거듭 기도를 올린다.
“우리 세 사람 모두 안전하게 불암산으로 하산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부디 지켜주시고 부족한 덕까지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만 세 명이 모두 완주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또 한 번 건너지 못할 루비콘강에 배를 띄운 셈이다. 도저히 못 가겠다 싶으면 중간에 탈출로는 많다.
산행 초반인데도 불볕더위에 가까운 더위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향로봉을 덮은 하늘도 티끌 한 점 없이 푸르다.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거리를 확보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보폭을 크게 한다.
“마귀 바위를 한 달도 안 돼서 또 보네.”
족두리봉 바로 아래에는 일부가 부서진 듯, 깨진 듯한 기이한 형태의 바위가 있어 많은 등산객이 이 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처럼 풍화작용으로 금이 가거나 부서진 바위를 토어tor라고 하는데 병소는 볼 때마다 마귀 바위라고 부른다.
족두리봉(해발 370m)은 보는 방향의 형태에 따라 수리봉, 시루봉, 독바위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향로봉으로 향하며 돌아보았을 때야 제대로 족두리처럼 보인다. 향로봉(해발 535m) 밑에서 잠시 멈췄다가 가려는데 향로봉이 고개를 숙여 바위 부스러기 많은 비봉능선을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출입이 제한된 향로봉은 중봉과 끝봉을 포함해 세 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향로봉을 지나 비봉 꼭대기의 진흥왕순수비를 보며 뜬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0대 명산 혹은 200대 명산 탐방, 백두대간 종주를 비롯한 여러 산의 종주 산행을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비견해보는 것이다. 제 땅을 넓히려는 의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만 말이다.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 병합, 한강 유역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 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현지 통치 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순행巡行하고 이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현재 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여기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4기가 남아있다.
“국보급인데 저렇게 비봉 꼭대기에 방치해도 되는 거야?”
“저기 세워진 건 짝퉁이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국보 제3호의 순수비 높이는 154㎝, 너비 69㎝, 두께 16.7㎝로 1972년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으며 비봉의 비는 그 복사본이다.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의 북한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비봉능선 자락은 초록에서 갈색과 다홍으로 변신 중이다. 사모바위에 이르자 드문드문 보이던 등산객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관복을 입고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를 닮아 이름 지어진 사모바위 아래에는 1968년 1·21 사태 때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남파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숨어있던 작은 굴이 있다. 지금 그 자리에 총을 겨누고 엎드린 그들의 밀랍인형을 만들어놓았다.
“김신조 보고 놀랐던 기억 나?”
“하하하!”
산행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의 병소를 바위 밑에 데리고 들어갔다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밀랍을 보고 깜짝 놀랐을 때를 떠올린 것이다.
“그땐 등산 왔다가 평양으로 잡혀가는 줄 알았지.”
지나온 비봉능선도 아득하게 뒤로 밀려날 즈음 뜨겁게 발광하던 태양열도 서서히 식고 어슴푸레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승가봉에서 보이는 의상봉, 용출봉, 증취봉, 나월봉과 나한봉을 연결하는 의상능선도 한낮 뜨겁던 열기가 식는 것처럼 보인다.
문수봉 릿지 아래의 단풍이 이곳만큼은 이미 가을이 왔다는 양 곱게 물들었다. 문수봉(해발 727m)에서 문수사를 내려다보고 보현봉을 마주하며 휴식을 취한다.
“지난 화대 종주가 생각나네요.”
“우리 셋 다 그 생각을 하며 걸어왔을 거야.”
은수에 의해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리산 화대 종주를 화두 삼는 건 그때의 밀착된 공감대를 다 같이 떠올리며 서로 힘을 실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때 함께 맛보았던 희열을 내일 하산해서도 느낄 것이라는 걸 서로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어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될 거야.”
아직은 산성의 윤곽이 뚜렷하게 선을 긋고 있다. 대남문으로 내려섰다가 대성문, 보국문을 지나고 대동문에 이르러서야 어둠이 짙게 가라앉는다. 여기서 저녁 식사를 한다. 배낭에서 풀어낸 먹거리가 일류 음식점에서 먹을 때보다 맛있다.
산 밑에서 뜨기 시작한 달이 꽤 높이 올라왔다. 내일 뜨는 달이 연중 가장 크고 밝은 슈퍼 문super moon이라 하니 새벽 까만 길도 밝게 비춰주길 기대해본다.
은평 뉴타운이 개발된 이후로 그 지역에 살던 개들이 주인 잃고 집 잃어 헤매다가 유기견이 되었다고 한다. 산짐승이 되어버린 그 유기견들이 가끔 출몰한다고도 하여 스틱을 움켜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헤드 랜턴을 착용하고 동장대, 용암문을 지나 노적봉 하단에 이를 때까지 유기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백운봉암문(위문)에 닿아 백운대까지 오른다. 깜깜한 밤중에 북한산 최정상까지 올라보긴 처음이다. 백운대는 늘 그랬던 것 같다. 바람을 마주하곤 숨을 쉬기도 곤란할 정도로 세차게 분다. 세차게 부는 바람 속에서 손가락을 펼쳐 인증 사진도 찍고 소리 내어 웃어도 본다.
이처럼 맑은 성취감과 소탈한 자긍심을 그 어디라서 느낄 수 있을 쏜 가. 백운대에 서 있노라면 칠흑 어둠이 세상을 덮었어도 북한산의 독특한 풍광들이 모두 눈에 아른거린다.
태조, 영조, 정조 등 조선의 군왕들이 북한산의 수려함에 매료되어 시를 지었었고, 수많은 묵객과 시인들이 북한산을 찾아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바 있다. 그때도 가을이었나 보다. 최고봉 백운대에 오른 다산茶山은 지난 세월의 아쉬움을 자연의 유유함으로 달래고자 한 수 멋진 시를 지었다.
누군가 모난 돌 다듬어 誰斲觚稜考
높이도 이 백운대 세웠네 超然有此臺
흰구름 바다 위에 깔렸는데 白雲橫海斷
가을빛이 하늘에 가득하다 秋色滿天來
천지 동서남북은 부족함이 없으나 六合團無缺
천년 세월은 가고 오지 않누나 千年渀不回
바람맞으며 돌연 휘파람 불어보니 臨風忽舒啸
천상천하가 유유하구나 覜仰一悠哉
- 백운대에 올라登 白雲臺 / 다산 정약용 -
백운산장에서 산장지기 어르신이 손수 타 주신 커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너무나 오래 이 자리에 있었고 자주 들렀던 백운산장은 들어설 때마다 아늑해지고 나설라치면 서운해지는 곳이다.
“어르신 오래오래 여기 계세요. 담에 또 들르겠습니다.”
산장을 나와 인수대피소 쪽으로 내려선다. 하루재에서 영봉에 올라 환한 보름달 아래에서 도심 야경을 내려다본다.
“가족은 물론 아는 이들 모두 저 아래에 있는데 나는 왜?”
이렇듯 야심한 밤중에 산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은 야릇한 느낌이 들게 한다. 가끔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둠 속 인수봉은 훨씬 더 우람한 덩치로 다가선다. 영봉은 정면에 인수봉이 우뚝 서 있음으로써 더욱 도드라지는 봉우리이다.
숱하게 산화한 인수봉의 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영봉靈峰 아니던가. 등반가들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깨달으려는지 여전히 인수봉의 한 점 살이 되고 한 조각 뼈가 되어 산인 일체山人一體로 존재해오고 있다.
영봉 언저리에 키 작은 소나무는 밤에도 여전히 푸르고 건강하다. 바위 속에 단단히 뿌리를 묻고 단 한 해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 한 그루 작은 소나무는 볼 때마다 인수봉 등반 중 산화한 산악인들의 넋을 기리고, 암벽 단애에 매달린 이들의 무사 산행을 염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또 내려가세.”
영봉에서 짧지 않은 밤길을 내려와 육모정 공원 지킴터를 지나면서 다섯 산 중 가장 긴 북한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우이동 편의점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도 이완시킨 후 도봉산으로 들어선다.
“완전히 하산했다가 다시 올라간다는 게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주네요.”
“그것도 깜깜한 새벽 아닌가. 그래도 이따 사패산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수락산 오를 때보다는 덜할 거야.”
칠흑 어둠에 가린 도봉 주능선, 포대능선, 사패능선을 잇다
우이암 능선 들머리에서 원통사를 지나 우이암을 지나고 주 능선에 들어설 때까지도 달빛이 밝게 비춰주어 감사한 마음이 굴뚝같다.
도봉산 최고봉인 자운봉 바로 아래까지 쉼 없이 걸어왔다. 오봉은 물론 칼바위와 주봉에 눈길도 주지 못하고 그저 랜턴으로 길만 밝히며 무작정 걸어온 것이다. 신선대에 올라 만장봉 아래로 반짝이는 야경을 보며 또 한 차례 서로를 격려한다.
“절반 이상 온 거지?”
“거리상으로는 그렇지.”
그렇지만 초반과 달리 피로는 더욱 극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쯤에서 더 힘을 충전시켜줘야 해. 내려가서 에너지 좀 섭취하고 가자.”
도봉산 정상을 내려선다. 지난 종주 때 여기서 보았던 일출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경이었다. 일출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작가들도, 등산객들도 매일 뜨는 해오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지금은 바람이 무척 차다. 다섯 산의 정상을 섭렵하기로 해서 오른 신선대이지만 바로 내려서지 않을 수 없다. 포대능선에 진입하여 바람을 피해 행동식을 꺼내먹으며 서늘해지는 새벽에 떨어지는 온기를 보충한다.
“장거리 산행은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여부가 관건인 거 같아.”
“맞아. 체온 유지, 식품 섭취, 보행속도 등이 모두 조화를 이루어야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게 되지.”
“많은 조난자의 배낭 속에는 먹을 음식과 보온의류가 충분히 있었다더군요.”
“허기가 지기 전에 먹지 못하고 저체온증이 오기 전에 옷을 꺼내 입지 못한 게 조난의 큰 이유였지.”
“산행 초기엔 지쳐서 입맛도 떨어져 에너지 관리에 실패하곤 했었어.”
“그래서 행동식이란 용어가 생긴 거 아니겠어. 지치기 전에 수시로 먹으며 걸을 수 있도록 말이야.”
에너지를 보충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잠깐, 아주 잠깐의 쪽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눈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어둠 산중에선 걷는 일밖에 할 게 없어. 정신 가다듬고 또 가자.”
Y 계곡을 우회하여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포대능선 끄트머리에서 통나무 계단을 내려간다. 다시 사패능선으로 오르는 데 호흡이 가빠진다. 평소엔 잠시 가파른 안부를 내려섰다가 오르는 정도의 수고로움으로 충분했는데 지금은 그리 길지도 않은 오름길이 꽤 버겁다.
사패산 정상에 이르러 내려다보는 의정부 시내의 불빛이 무척 밝다. 주말 밤이라 늦게까지 주안상 받아놓고 불야성을 이루는가 보다.
산은, 계절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만 달리해도 새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깜깜한 산, 칠흑 같은 어둠뿐이지만 보이는 게 무수하고 보이는 것마다 새롭다. 저처럼 넓은 곳을 밝혀주면서도 또 수많은 단점을 가려준다. 정치력 부재, 몰염치한 행정 부조리, 무능한 교육정책, 남편을 살해하고 토막 낸 부녀자 등등……, 다 가려준다. 산이기에 그런 것들을 잊을 수 있도록 해준다.
되돌아 600m, 범골 삼거리에서 두 번째로 하산하게 된다. 호암사를 지나 범골 통제소를 통과하면서 다시 속세로 내려왔다. 여러 산을 이어가며 많은 종주를 해보았는데 산에서 세상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산으로 오르는 일이 가장 고역스럽다. 지금 걷는 다섯 산의 종주처럼 완전히 도심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연계 산행은 그리 흔치 않다.
범골 입구의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씩 먹고 의자를 붙여 잠시 눈을 붙여본다. 일어나 동트는 걸 보니 집 떠난 지 열서너 시간 지났을 뿐인데 몇 날 며칠 떠돌이 생활을 한 기분이다.
“노숙자가 따로 없군.”
서로가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다.
두 번째 속세로 내려왔다가 또다시 산으로
여기서 도보로 한 시간 거리를 이동하여야 한다. 수락산 입구 동막골 들머리까지의 구간이다. 북한산에서 시작하여 불암산을 종점으로 하는 5 산 종주 중 가장 힘들고 가장 갈등하게 하는 곳이 이 지점이다.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눈꺼풀이 무거울 즈음 세 산을 타고 도심으로 하산했다가 또 올라가려니 망설임이 없을 수 없다. 지난 종주 때도 그랬었다. 뜨끈한 사우나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때처럼 똑같은 마음을 담아 속으로 기도를 올려본다.
“신이시여! 끝까지 가고 못 가고의 여부는 신께 맡기겠나이다. 다만, 제 의지가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힘을 주소서!”
그리고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린다.
“아직 힘 남았지?”
두 사람이 대답 대신 배낭을 짊어진다. 택시를 탈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걸어서 완주하기로 한 애초 계획대로 이행한다. 이른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가 지금 오르는 수락산행을 더욱 고되게 할 것 같다. 더구나 동막골에서 수락산 주봉까지는 그늘이 거의 없이 기복 심한 능선의 연속이다.
뙤약볕 등로를 치고 오르는 것도 고되거니와 도정봉과 홈통바위의 슬랩 암벽, 주봉을 찍고 도솔봉으로 내려서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힘든 걸 알고 시작했던 거였고 지금까지도 무척 힘들었다.
계단을 올라 도로를 건너면 동막골 수락산 진입로가 나온다. 거긴 또 다른 루비콘강이다. 저걸 건너려니 로마로 진격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된 느낌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veni, vidi, vici.”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평정하고 카이사르가 개선했을 때, 저 유명한 3V의 표현이 나왔었다. 그처럼 나머지 두 산, 수락과 불암을 정복하고 두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승리감을 만끽할지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결국, 강을 건너서 배를 돌려보내고 나니 그나마 갈등은 사라졌다. 역시 도정봉 긴 계단을 오르는 게 버겁다. 130m의 계단이 천릿길처럼 느껴진다. 도정봉에 올랐을 때는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다.
“밤길에 저길 다 지나왔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군.”
북한산부터 오른쪽으로 도봉산과 사패산, 지나온 북한산 국립공원 내의 세 산이 아득하게 펼쳐있다. 힘들게 먼 길을 와서 돌아보는 그 산은 마치 지난 삶을 돌아보는 기분이다. 오늘처럼 긴 여정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가야 할 길은 더 멀게 느껴진다. 올려다본 수락산이 유난히 높고 마루금도 아주 길어 보인다. 도정봉의 태극기는 조금도 펄럭이지 않는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가 야속하다.
“아까 백운대에서의 바람이 그리워.”
한기를 느껴서 얼른 내려왔는데 지금 그 바람을 맞고 싶은 것이다. 장암역으로 하산하는 석림사 방향 내리막길을 그냥 지나치는 걸음걸이가 무겁다 보니 가야 할 주봉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수락산이 이렇게나 먼 길이었다니.”
가파르고 미끄러운 바윗길, 숱하게 나타나며 시험 들게 하고 도전하게 만드는 데가 산 아니던가. 매번 그런 데라는 걸 알고 왔지 않은가.
“아무리 멀어도 이젠 기어서라도 가야지.”
마주쳐 피할 수 없다면 어쩌겠는가. 바위벽에 손바닥 문질러가며 기어올라 새롭게 길 내야지. 넘어지지 않고 산 오르내리길 바라는가. 자빠진 발길마다 교훈으로, 엎어진 흔적마다 지혜로 되새길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그렇게 해야지.
“포기만 하지 않으면 끝을 보는 데가 산 아니겠어?”
깨지고 멍들면서 예까지 온 거 아니었던가. 산이나 인생이나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얼음물 한 모금에 씻기는 게 갈증 아니던가. 지나고 나면 죄다 한바탕 봄 꿈같은 게 사는 일 아니었던가.
전신에 힘이 빠져 밧줄을 놓칠까 싶어 우회로로 빠지려다가 홈통바위(기차바위)와 한판 맞붙어보기로 한다. 숱하게 오르내렸던 홈통바위의 기다란 밧줄이 오늘은 더욱 굵고 무겁게 느껴진다.
다리보다 팔의 힘이 더 요구되는 슬랩 구간인데 체력이 소진되는 시점이라 올라섰을 때는 땀이 철철 흐른다. 바위 위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다. 홈통바위 상단 바로 위로 608m 봉이다. 여기부터는 그나마 그늘숲이라 조금은 힘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이 이만큼 힘들까.”
수락산 주봉(해발 637m)의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고 병소는 3.1 만세운동이라도 떠올렸던가 보다.
“독립운동은 탑골공원 같은 데서 하니까 이보다는 덜 힘들겠지.”
주봉에서 마주한 도봉산 사령부가 깃발을 펄럭이며 성원해준다.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며 또 지켜주겠네. 힘들 내시게나.”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등 도봉산 바위 봉우리들이 하늘 찌르며 장대하게 솟아올랐다면 철모바위, 배낭바위, 하강바위 등 수락산 바위들은 오밀조밀 조경을 위해 배치한 소품들처럼 여겨진다.
수려함과 웅장함으로 비교하려면 수락산은 촌색시 같아서 강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수락산 바위들이 그렇다는 건 도봉산과 다르다는 것일 뿐, 그 다름은 상호 동등한 가치의 특색이며 뚜렷한 개성일 뿐 우열을 헤아리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서울시와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에 솟은 수락산은 등산로가 다양하고 계곡도 수려한 데다 교통이 편리해서 휴일이면 수도권의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돌산으로 화강암 암벽이 노출되어 있으나 산세는 그다지 험하지 않다. 수락산이 힘든 건 바로 지금처럼 연계 산행을 하며 인색한 수림을 걸을 때이다.
휴일이라 코끼리바위, 치마바위에도 등산객들이 붐빈다. 다들 우리보다는 싱싱한 안색이다. 그들과 달리 숙제하듯 산행을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무리 숙제인 불암산으로 장을 넘긴다.
한점 두점 떨어지는 노을 저 멀리 一點二點落霞外
서너 마리 외로운 따오기 돌아온다. 三个四个孤鶩歸
산봉우리 높아 산허리 그림자 덤으로 보네. 峰高剩見半山影
물 줄어드니 푸른 이끼 낀 돌 드러나고 水落欲露靑苔磯
가는 기러기 낮게 맴돌며 건너지 못하는데 去雁低回不能度
겨울 까마귀 깃들려다 놀라 도로 날아간다. 寒鴉欲棲還驚飛
하늘은 한없이 넓은데 뜻도 끝이 있나 天外極目意何限
붉은빛 머금은 그림자 맑은 빛에 흔들린다. 斂紅倒景搖晴暉
- 수락잔조水落殘照 / 매월당 김시습 -
무사 완주, 눈빛 가득 기쁨이고 무한한 감동이다
아래로 수락산과 불암산을 연결하는 덕릉고개 동물이동통로가 보인다. 이제 총 목표 지점의 9부 능선쯤 온 셈이다. 여기서 수락산 쪽을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하고 뜨끈해진다.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느낌이다.
“스틱을 접을 때까지 지켜주시고 또 지켜주옵소서.”
마지막 남은 불암산을 오르며 겸허히 그리고 숙연하게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제 불암산만 남았네. 힘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자고.”
수락산 날머리이자 불암산 들머리 덕릉고개를 넘어서면서는 되레 힘이 솟구친다. 구간이 가장 짧은 불암산만 남겨뒀기 때문일 것이다. 숲이 우거져 수락산보다 덜 덥고 걷기도 수월한 편이다.
‘삼각산은 현 임금을 지키는 산이고, 불암산은 돌아가신 임금을 지키는 산이다.’
근원지는 모르지만 북한산과 불암산을 두고 이렇게 말들을 한다. 경복궁에서 가까운 북한산이니 살아있는 왕을 지킬 것이고, 태릉을 비롯하여 광릉, 동구릉 등 많은 왕릉이 불암산 가까이 있으니 그런 표현이 나왔을 법하다.
본래 금강산의 한 봉우리였던 불암산이 한양으로 오게 된 건 건국 조선 도읍지의 남산이 되고 싶어서였다. 한양에 남산이 없어 도읍 정하기를 망설인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으나 이미 남산이 들어선 후였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한양을 등진 채 머물고 있다. 금강산이 되고자 했던 울산바위와 달리 금강산을 떠난 불암산의 설화다.
큼직한 바위 봉우리가 중의 모자인 송낙을 쓴 부처 형상이라 그 이름을 불암산佛巖山이라고 지었단다. 1977년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암벽등반을 하려 많은 애호가가 즐겨 찾는 산이기도 하다.
어림잡아 3000개 이상의 계단을 걷지 않았을까. 다람쥐광장으로 불리는 석장봉에서 지척에 펄럭이는 정상의 태극기를 보노라니 광복의 순간처럼 감동을 자아낸다.
세 번째지만 여기 다섯 산을 잇는 행보는 늘 똑같은 감동을 안긴다. 이제 정상 오르는 계단이 오르막으로서는 마지막 계단이다. 불암 지킴이, 쥐바위가 고개 쳐들어 환영의 고함을 내지른다.
“몰골은 거지 같지만 그대들은 진정한 부자들일세.”
“고양이나 조심하게. 수락산 고양이들은 사납던데.”
또다시 태극기를 접한다. 불암산 정상(해발 508m)의 게양대 옆에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때는 다들 형언키 어려운 희열을 맛보게 된다.
“결정했노라.”
“시작했노라.”
“해내고 말았노라.”
그랬다. 그렇게 힘든 결정을 했고 시간 맞춰 세 사람이 모였으며 마침내 마칠 수 있었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학도암을 지나고 불암산 날머리 중계본동 진입로까지 와서 악수하고 포옹한다. 3V, 무사 완주의 카타르시스를 공유하며 서로를 위안하고 격려한다. 눈빛 가득 기쁨이고 무한한 감동이다.
2011년 11월 말, 나 홀로 불수사도북 5 산 종주에 이어 1년 반이 지난 이듬해 여름 다시 그 길을 반대로 걷는 북도사수불을 역시 홀로 종주했었다. 당시 새벽 영하의 추위와 30도가 넘는 무더위를 견디며 길고도 먼 고행을 자청했던 건 무모하지만 그마저 감수하려 했던 객기 실린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두 해를 넘긴 2014년 10월 초, 이번 세 번째 산행은 사랑하는 친구와 후배가 함께 함으로써 큰 힘을 얻고 버거움을 덜 수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때 / 초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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