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산 26
산에서는 세 가지를 낮추라는 말이 있다.
욕심을 낮춰 무리한 산행으로 안전을 해하는 일이 없게 하고,
몸을 낮춰 걸음을 효율적으로 하고,
목소리를 낮춰 자연이 놀라지 않게 할 것이다.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과 광주시 실촌면에 걸쳐 있는 원적산圓寂山은 광주와 이천을 잇는 넓고개를 건너 솟구친 산으로 무적산이라고도 한다. 동으로는 여주시, 서로는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어 동서로 길게 이어진다.
봄꽃은 새로움이다.
화창한 봄날에 미세먼지도 없어 어디로든 뛰쳐나가고 싶어지는 주말이다. 잠실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광주 곤지암읍의 경충대로 변에 있는 동원대학교로 간다. 정문을 통과하여 종점에서 내리면 교정 안이다. 종점에서 도로를 건너 쭉 걸어가다 보면 임도처럼 넓은 둘레길이 나온다.
오른쪽 넓고개로 가는 길을 놓고 왼쪽 범바위 약수터로 방향을 잡는다. 이천 MTB 코스와 겹치는 길을 따라 약수터에서 산길을 오르자 노랗게 핀 산수유가 제일 먼저 환영한다.
지난겨울, 오래도록 하얗게 쌓인 설산을 걸었던지라 찾아온 봄이 무척이나 반갑다. 긴 동면에서 깨어나 생기 가득한 따사로움을 뿜어내는 대지가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개나리의 노랑과는 또 다른 노랑이 연분홍 진달래와 어우러져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눈멀면 어디라서 눈부시지 않으랴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하나라도 있으랴
속 텅 비우면 되레 무어로도 가득 차니
다 내려놓고 허허로운 산정에서
가는 세월 바라보며 응어리졌던 속속 마다
햇살로 가득 채운다네.
봄꽃은 새로움이다. 만물이 일제히 소생하는 봄의 정기는 꽃으로부터 발현되기에 봄꽃을 보기 위해서라도 신춘 산행을 하게 된다. 봄의 신선한 정기를 받아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자 한다. 원적산의 능선에 서면 초원이 푸릇하게 깔려 봄 산행에 특히 적격인 곳이라 하겠다.
나무계단 깔린 주능 1봉까지 올라가는 길이 살짝 가파르다. 20여 분 바짝 고도를 높여 다다른 주능 1봉에 눈길만 주고 바로 봉현리 갈림길을 지나 주능 2봉에 닿는다.
이정표마다 산수유 축제장을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축제장까지 7.43km임을 알려준다. 앵자지맥 중간 지점에 위치한 능선이다. 편차가 크지는 않지만 고만고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송전탑이 세워진 안부를 지나 정개산(해발 407m)에 닿는다. 정상석에 소당산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솥뚜껑(소당)을 엎어놓은 것처럼 뾰족하다는 의미로 솥 정鼎, 덮을 개蓋자를 쓴다. 또 옛날에는 이 지역의 지석리 마을 주민들이 해마다 소 한 마리를 공양으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하여 우당산牛堂山이라고도 불렀다.
미세먼지조차 없어 설봉산과 도드람산이 환히 눈에 들어오고 산 아래 이천의 시골 마을과 들녘에도 봄기운이 생생하다. 남촌 CC의 누런 필드도 곧 초록 잔디로 바뀔 것이다.
정개산은 원적산으로 가는 길목일 뿐이라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뎌 봉현리 갈림길을 지나고 지석리 갈림길도 지난다. 주변의 나무들은 헐겁지만, 햇살을 받아 빈한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어 골프장 갈림길에서는 광주시와 연결된다. 광주시를 푸근히 휘감은 무갑산과 관산을 보며 걷게 된다.
유난히 갈림길이 많다. 그만큼 이 산으로 올라오는 길이 많다는 것이다. 서서히 나무가 사라지더니 민둥산처럼 뻥 뚫린 능선이 나타난다. 도암 사거리를 지나 약간 가파른 오르막이다.
수리산이라고 하는 주능 3봉(해발 549m)도 곧바로 통과하여 장동리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다. 천덕봉으로 오르기 전의 안부인 헬기장에서 조금 더 지나 천덕봉과 원적산의 능선을 바라본다. 잔잔하고도 부드러운 능선이다. 능선에 이르자 탐방객들이 더욱 늘었다. 프로야구 시범경기를 관람하는 대신 산행을 겸해 산수유축제를 즐기려는 이들이 이 산을 찾았을 것이다.
방화선이 뚜렷한 천덕봉 안부는 사격훈련을 위해 시계가 훤히 트여 많은 이들이 야영 장소로 즐겨 찾는다. 곤지암이 내려다보이는 너른 초원지대에 텐트를 치고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며 천덕봉天德峰(해발 634.5m)에 도착한다. 정상석에 이천시 신둔면 장동리 산 1번지라고 적혀있다.
“이천 최고봉인데 원적산 주봉 자리는 동생한테 내어준 모양입니다.”
“허허허, 권력에 욕심이 없다네. 훌훌 마음을 비운 지 오래되었다네.”
“잘하셨습니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개경에서 피난길에 오른 공민왕은 파주를 거쳐 이곳 이천에 이르렀다가 음성, 충주, 조령을 지나 안동까지 가게 되었다. 개경을 점령한 홍건적이 아녀자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백성을 마구 수탈하고 온갖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소식을 여기서도 듣게 된 공민왕의 심정이 어땠을까.
이천을 지나던 공민왕이 여기 천덕봉에 올라왔다니 아마 이 자리에서 펑펑 눈물을 쏟고 후일을 기약하며 이를 갈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떻든 여기까지 왔었기에 공민왕봉이라고도 불린 바 있으니 진작 최고의 권좌에 올라본 적이 있는 천덕봉이기는 하다.
산에서는 세 가지를 낮추라는 말이 있다. 욕심을 낮춰 무리한 산행으로 안전을 해하는 일이 없게 하고, 몸을 낮춰 걸음을 효율적으로 하고, 목소리를 낮춰 자연이 놀라지 않게 할 것이다. 천덕봉 역시 욕심을 낮춰 벼슬이나 권력에 초연하다고 여겨 정상석을 어루만지며 인증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능선을 걸어 원적봉이라고도 부르는 원적산 정상(해발 564m)에 이른다. 양평의 추읍산도 가늠되고 아래로 마을을 온통 노랗게 물들인 산수유 축제장이 보인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중심으로 했던 신진사류들이 몰락하자 난을 피해 낙향한 엄용순이라는 선비와 다섯 동지가 아랫마을 도립리에 육괴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그 앞에 못을 파서 연을 심고 각각 한 그루씩 여섯 그루의 느티나무와 산수유나무를 심어 산수유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매화와 같이 산수유 역시 선비를 상징하는 꽃이다.
여기서 산수유 마을로 하산한다. 낙수제 갈림길에서 가늘게 물을 흘러내리는 낙수제 폭포를 지난다. 하산길 주변의 산수유마을은 노랗게 만개한 산수유축제 기간이라 인산인해를 이룬다. 전남 구례의 산수유 마을과 양평 추읍산 밑의 산수유 마을에서도 풍성한 산수유를 보았었다.
도립리는 마을 전체가 산수유 군락을 이뤄 해마다 이맘때면 황홀경을 연출한다.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 하나 대학공부까지 시켰다니 얼마나 귀한 나무인가.
이곳의 산수유나무는 수령이 백 년을 넘는 나무가 많다고 한다. 이천 봄꽃 구경의 명소로 등장한 산수유 마을에서 선홍의 열매를 맺어 풍요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하게 될 올가을을 떠올리며 물결치듯 절정을 이루는 황금색 정원을 빠져나간다.
때 / 초봄
곳 / 동원대학교 - 범바위 약수터 - 주능 1봉 - 주능 2봉 - 정개산 - 주능 3봉 - 천덕봉 - 원적산 - 산수유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