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산 9
추월산 단풍이 곱고도 아련하다. 이 가을의 마지막 붉음이겠지.
너무나 짧은 가을이라 붙들려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세월이란 게 얼마나 짧은 건가. 내년에 다시 물들 때까지도
겨우 찰나의 짧음이겠지.
강천산에서 하산하여 월계리 추월산 입구까지 두 번 버스를 갈아타고 와서 민박집을 잡았다. 있을 데가 아닌 곳에 있다는 건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
초록빛 커다란 섬광, 강한 원심력으로 내 육신 잡아끌기에 순순히 몸 실어 무작정 이끌려 내려진 곳, 기암절벽 사이사이 수림 우거지고 때론 연무로 모든 게 가려진 곳. 낯선 객지에 와있지만, 전혀 있을 데가 아니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원해서 찾아온 자연의 언저리, 능동적으로 자리 잡은 산모퉁이 낯선 장소가 아늑하기만 하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산은 그 상태 그대로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품고 있으므로 난 이미 그 산 깊은 품에 안겨있다.
왜병들의 수탈이 특히 심했던 산
“하룻밤 잘 지내고 갑니다.”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옅게 안개 깔린 길을 나선다. 전남 담양과 전북 순창의 경계이자 호남정맥의 한 구간인 추월산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이자 전남 5대 명산의 한 곳이다. 가을이면 산봉우리가 보름달에 맞닿을 것처럼 높다 하여 추월산秋月山이라 명명했다.
대나무 고장답게 들머리부터 대나무 숲길로 시작한다. 오르막 도중에 늦은 일출을 보게 된다. 시나브로 남도 산자락에서 빛을 발하며 솟아오르는 일출이 낭만 가득하다. 가슴을 크게 벌려 해를 품는다. 내부 깊이 산바람을 들이마신다. 신선하다.
산세가 거칠기도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땀이 많이 난다. 밧줄이 나무 둥지를 감아 길게 이어진다. 가파른 너덜 길의 연속이다. 어느새 머리 위까지 치솟은 태양이 인적 없이 쓸쓸한 산길을 호젓하게 비춰준다. 등이 축축하게 젖을 즈음 닿은 능선도 그 길은 간밤에 내린 이슬로 축축하다. 나무 팻말 이정표에 몇 갈래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위로만 향할 뿐이다.
허다한 갈림길
헤매고 헤매는 게 삶
바위길, 샛길
이끄는 대로 가는 게 산
찾아 멈춘 곳이 정착할 곳 아니거늘
한 자락 햇빛 손바닥에 움켜쥐고
한 줌 달빛 가슴에 스며들므로
어디로 향하든
어디에 머물든
전혀 낯설지 않네.
담양읍에서 보면 스님이 누워 있는 형상의 추월산 정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리본을 달아 다녀간 자취를 남겨놓았다. 월계리 들머리에서 1.4km, 정상 표고가 731m이니 오름 기울기가 꽤 급한 편이라 하겠다. 태양보다 더 빠르게 올라왔나 보다. 해는 아래 등성이를 넘으며 찬란한 금빛을 뿜어낸다. 산정은 비록 혼자일지라도 누군가와 함께 희열을 느끼는 것만 같은 장소이다.
추월산은 인근 금성산성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치열한 격전지였으며, 동학 농민항쟁 때도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항거했던 곳이다. 의로운 혁명이 실패로 끝나는 그 자리에 서니 그의 의로운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내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죽고자 함입니다.”
한양으로 올라가 대원군을 만난 녹두장군 전봉준은 그렇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끝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봉준과 대원군은 모종의 밀약을 협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층 농민 대중으로부터 힘을 결집하여 봉건주의를 타파하고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으나 일본 군사력에 의해 좌절당하고 만다. 전봉준이 영도한 갑오 농민전쟁은 이후의 사회변혁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1895년 12월 2일, 이곳 추월산 인근의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한양으로 압송되어 다섯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사형을 선고받았고, 3월 30일 그의 동지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의 1, 2차에 걸친 농민항쟁을 더듬으며 서서히 안개가 사그라지는 담양호를 내려다본다.
하산할 즈음엔 쾌청해지길 바라게 된다. 무등산에서는 멀리까지 선명하게 조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곧바로 보리암으로 향한다. 보리암으로 가는 길도 등산화를 적실 정도로 이슬이 축축하다. 이곳은 각종 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진귀한 추월산 난이 자생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보리암 상봉은 뒤로 깎아지른 절벽이지만 등산로에서 보면 산정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밋밋하다. 추월산은 그 정상보다 보리암 정상이 더 알려져 있다. 기암절벽에 자리 잡아 산 아래로 혹은 사방 곳곳 탁월한 전망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경사 급하게 만든 나무계단을 내려서서 보리암을 둘러본다.
보조국사가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나무 솔개 세 마리를 날렸더니 한 마리는 조계산 송광사에, 또 한 마리는 이곳 보리암에 내려앉았고 마지막 한 마리는 백암산 아래 백양사 자리에 내려앉아 각각 그곳에 명찰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인지라 부분적으로 달라졌겠지만, 송광사에 전해지는 내용은 나무 솔개를 날렸다는 장소가 천왕봉이 아닌 모후산이고, 마지막 솔개가 앉은 절터는 백양사가 아닌 흥국사라고도 전해진다.
어쨌든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보리암은 전라남도 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고 백양사에 딸린 작은 암자이다. 경내엔 향내 그득 풍기는데 스님이든 보살이든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보리암을 거쳐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담양호 물살이 선명하다.
일천 계단은 족히 넘을 나무계단을 내려오면 다시 너덜길이다. 보리암 중창 공덕비라고 적힌 비석 바로 옆에 임진왜란 때 마을 주민들이 피신했다는 굴이 있는데 훗날 매립이 되었는지 들여다보니 텐트 정도의 면적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곳곳에 왜병들한테 수난을 당한 흔적이 많은 산이다.
등산로 분기점까지 내려오자 돌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하나씩 둘씩 저마다의 소망을 기원하며 돌탑을 쌓았으리라. 작은 돌 하나를 얹어놓으며 그들의 소망이 이뤄지길, 또 내게도 줄기차게 남아있는 작은 소망 하나가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다 내려올 때쯤 되어서야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에 못 본 추월산 단풍이 곱고도 아련하다. 이 가을의 마지막 붉음이겠지. 너무나 짧은 가을이라 붙들려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세월이란 게 얼마나 짧은 건가. 내년에 다시 물들 때까지도 겨우 찰나의 짧음이겠지.
내려와 올려다본 보리암 정상은 위에 섰을 때와 달리 근육질로 단련되어 있다. 잘 정비된 담양호 산책로를 걷는 것도 운치 있을 것 같았지만 무등산 서석대가 눈에 밟혀 담양호 앞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한다. 채 걷히지 않은 안개가 제풀에 꺾이기를 바라며 시간을 단축해 서두른다.
“미안하네요. 짧은 시간에 이 지방의 산들을 두루 찾으려는 욕심이 앞서 소란만 떨다 훌쩍 떠납니다.”
때 / 가을
곳 / 월계리 - 펜션 촌 - 월계 삼거리 - 추월산 - 깃대봉 - 상봉 - 신선대 - 보리암 - 공덕비 - 돌탑 - 추월산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