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리마다 자애롭게 끌어안은
대둔산 가을 정취

충청도의 산 9

by 장순영

티 한 점 없이 고운 하늘이다.

거침없이 맑은 이 하늘 밑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생각이 무엇엔가 슬픔을 느낀다면 무척 불행할 거란 든다.

그런 하늘이 눈부시게 머리 위로 펼쳐져 있다.



한듬산, 인적 드문 오지 두메산골의 험준하고 큰 산이라는 의미. 대둔산大芚山의 원래 명칭이다. 혹자는 계룡산과 지척에 위치하고 두 산의 형상이 적잖이 닮았지만 산태극, 수태극의 커다란 명당자리를 계룡산에 빼앗겨 한이 맺혔다 해서 한듬산이라는 뜻풀이를 내놓기도 했는데 그 풀이의 합리성엔 쉬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만해 한용운은 이렇게 말했다.


“태고사를 보지 않고는 천하의 명승지를 논하지 말라.”


대둔산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두 도에서 동시에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산이다. 충남 금산에서의 대둔산 오름길, 진산이니 명산이니 아무리 칭송해도 모자람 없는 대둔산으로 들어선다.



가을 수북한 산마루, 하늘 맞닿은 산정

가을 대둔산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2).jpg 가을 대둔산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배티재에서 산비탈을 가로질러 진산면 행정리에 소재한 옛 절 태고사太古寺로 향한다. 양옆으로 커다란 바위 벼랑이 보이고 그 사이로 비좁게 통과할 수 있는 틈이 있다. 그 왼쪽 바위에 붉은 한자로 석문石門이란 글씨가 각인되어있는데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태고사의 절터를 발견하고 너무 기뻐 사흘 동안이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12 승지의 한 곳인 태고사의 빼어난 풍광을 강조한 듯하다. 경내의 전단 향나무로 조성된 삼존불상을 개금改金할 때는 청천벽력 같은 뇌성이 치며 폭우가 쏟아져 금칠을 말끔하게 벗겨내었다고도 한다.


“과연……”


둘러보니 원효가 어깨춤을 들썩일 만큼 빼어난 비경에 둘러싸여 있다. 임진왜란 전적지이기도 한 태고사에서 나와 한적하고 평범한 산길을 오르다가 낙조대, 칠성봉의 암릉에 이르면서 세상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절로 벌어지는 입에서 탄성만 흐른다. 일몰의 장관을 보여주는 낙조대는 충남 논산에 속한다.

진산珍山 중의 진산鎭山이라 표기한 동국여지승람, 사흘을 둘러보고도 발길을 뗄 수가 없다던 원효대사의 표현이 조금도 과장스럽지 않다. 눈과 바람이 깎아내고 비로 씻어 햇빛으로 말린 조각품들의 전시장에 들어선 것 같다.

숲과 협곡은 또 어떠한가.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수려한 자연미에 초절정의 단풍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특급 산행이라 할 수 있겠다. 등산이라기보다는 관광이라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다리보다 눈이 바삐 움직이게 된다.


“도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예요?”


사실 어제부터 심한 감기 기운으로 날 밝도록 끙끙 앓아가며 뒤척였지만, 친구 기남, 후배 계원이와 진즉 약속을 했던지라 밟힌 듯 채인 듯 뻐근한 몸뚱이를 간신히 지탱하고 집을 나선 거였다. 차에서도 몰려드는 피로와 불안감에 간간하게 남았던 정념마저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포기는 포기할 단계에 하는 것’


산을 다니면서 스스로 다진 엉뚱하고도 위험천만한 철학을 되뇌며 배낭을 걸쳐 메었다. 처진 육신 일으켜 세워 무념무상 산자락에 몸 실으니 골짜기 휘도는 미풍이야말로 포도당이요, 더 붉어질 수 없어 떨어지는 낙엽 밟으니 불면에 근육통 치유할 신약 이만한 게 또 있던가. 거짓말처럼 개운하게 몸도 머리도 맑아지면서 가을은 더욱 수려하고 여긴 더더욱 호방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좀 천천히 가자. 금방 쓰러질 것 같더니 걸음은 빠르네.”


잠시 쉬는데 느릿하게 뒤따라온 기남이의 불거진 배를 찌르며 한마디 핀잔을 준다.


“넌 이런 곳에서도 숨이 헐떡여지니?”


체중이 늘고 몸이 불어나서야 산을 찾기 시작한 친구가 산 오르는데 급급해하지 않고 산세가 먼저 눈에 들어올 즈음이면 뱃살이 빠질 거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다시 내려올 건데 왜 올라가는 거야?”


이랬던 사고방식이 사라지고 산이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친구가 대견스럽다. 주된 행사인 시상식 장면보다 행사장에 입장하여 레드카펫red carpet을 걷는 스타들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처럼 대둔산 레드카펫에 눈을 떼지 못하고 걷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노란 은행잎 가을 수북한 산마루

어지러 비록 뒤돌아 내려 보진 못하지만

긴 세월 아련한 추억 새록새록 떠올리며

꽃밭 거닐듯 구름 밟듯 다다르니 어느새 하늘일세


첩첩 마루금이 산그리메를 형성하고 있다


개척 탑이 세워진 대둔산 정상 마천대(해발 878m)는 하늘과 맞닿았다 하여 원효대사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마천대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인 정상도 흔치 않다. 오늘 가을 절정의 대둔산은 아래로 명물이랄 수 있는 금강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이 울긋불긋한 단풍 속에서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중이다.

시선을 멀리 뻗으면 맑은 날에는 진안 마이산, 지리산 천왕봉, 서해안 변산반도가 펼쳐진다는데 오늘은 그만큼 청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찬찬히 사방을 둘러보면 시야에 차는 것마다 구름 뚫고 하늘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역시 대한 8경에 들 만큼 매혹적인 절경이다. 가히 이럴 진데 계룡산에 맺힌 한풀이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산이 언제 그 속을 비춰 미간을 찌푸리거나 등 돌린 적 있던가. 역시 사람들이 저들의 속내를 드러내 산을 소품 삼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대둔산 곳곳마다 큼직한 기상과 호연지기를 뿜어내는 것이 역시 한듬산의 ‘한’은 크고 넓다는 의미였음을 확인시킨다. 그게 맞을 것이다. 그게 맞는 거라고 믿고 싶다. 보라, 주변 산마다 그 봉우리들이 대둔산을 향해 늘어서고 대둔산은 자애롭게 그 봉우리들을 끌어안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는 사진을 남겨야지.”


기남이와 계원이가 다리 한편으로 비켜서서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한다.


“그래, 그쪽으로 서봐.”


80m 높이에서 양옆 절벽, 임금바위와 입석대 50m를 잇는 금강구름다리에서는 사진 찍기도 수월치 않다. 역시 수많은 인파의 행렬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환한 웃음과 소란한 즐거움이 살갑게 와닿는다.

그래서였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 대둔산은 감성이 무디어 웃음이 인색한 사람들, 무뚝뚝하여 접근하기가 껄끄러운 이들과 함께 오고 싶은 곳이란 생각. 그런 사람들이 가을 대둔산에 오면 눈가 가득 미소를 지을 것 같고, 감탄을 연발할 것 같다. 대둔산은 그렇게 찾는 이들과 쉽게 가까워지고 오래도록 연을 이어가는 그런 산이다.

휘돌아 굽이치며 걸음 뗄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산세의 움직임은 산행 내내 지루하거나 고될 여지를 없애준다. 그게 가을 대둔산이다.

삼선교와 그 위의 마천대까지 온통 가을이 물들었다



아무 때고 또 오고 싶은 산이다


티 한 점 없이 고운 하늘이다. 거침없이 맑은 이 하늘 밑에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생각이 무엇엔가 슬픔을 느낀다면 무척 불행할 거란 든다. 그런 하늘이 눈부시게 머리 위로 펼쳐져 있다. 이런 하늘 아래에선 어느 러시아 민요의 가사처럼 백만 송이 꽃이라도 피워야 한단 생각이 스친다.

이토록 고운 하늘을 보면서는 지나온 삶의 티끌들을 툭툭 털어내고 명명 덕明明 德의 구절을 음미해야 어울릴 거란 느낌이다. 담긴 무거움은 모두 털어내고 노랑나비 날갯짓에 바람이라도 일 듯한 청명한 기운으로 채우고픈 오늘, 하늘빛 너무 고와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한, 그런 가을에 대둔산에 있음이 행복하다.


“친구야, 자네는 아니 그런가.”

“난, 아직도 숨 가쁘고 다리 아파. 배도 고프고.”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너 때문에 우리는 평생 삼선이 되긴 글렀어.”


만경대를 위로하여 깎아지른 절벽 군락이 또한 일품인데 세 명의 선인이 능선 아래를 굽어보는 모습과 흡사하여 삼선바위라 명명했다. 찾는 이들이 거길 오를 수 있게끔 50도의 경사각, 계단 127개, 40m 길이로 세운 삼선계단은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다양한 볼거리 중에서도 장군봉을 휘감아 치장한 단풍들이 가을 대둔산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마치 승전하고 돌아온 장군이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꽃 갑옷을 걸친 모습에 견주고 싶어 진다. 장군도 기분 좋게 마신 전승주에 취기가 잔뜩 올랐는지 만면에 홍조를 띠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일 줄 알았다면

피멍 들도록 쓰린 아픔이야 죄다 묻어둘 수도 있으련만

수북이 고여 오는 어스름 노을빛은 그 무어로 가린다냐


원효대사처럼 사흘을 둘러볼 수는 없지만 세 번째 다녀가는데도 아무 때고 또 오고 싶은 산이다. 겨울철, 하얗게 변신한 대둔산을 다시 보겠노라고 마음에 새기면서 아쉬움 가득 고이는 대둔산의 가을을 묵연히 올려다본다.

21. 대둔산의 모든 암봉들이 만면 가득 홍조를 띄고 있다.jpg 대둔산의 모든 암봉들이 만면 가득 홍조를 띄고 있다



때 / 가을

곳 / 배티재 - 태고사 - 낙조대 - 칠성봉 - 마천대(대둔산 정상) - 약수정 - 구름다리 - 장군봉 - 칠성봉 전망대 - 낙조산장 - 태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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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오름길의 풍광
15271E444EA7B92018 정상 마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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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
세 선인이 능선 아래를 굽어보는 모습 같다하여 명명한 삼선바위
1737CD334F4786372D 대둔산 암벽
시나브로 가을의 절정으로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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