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 선비와 사무라이의 만남 2

<조선의 선비가 일본 사무라이를 만날 때>

by 임태홍

<조선의 선비가 일본 사무라이를 만날 때> 7-8쪽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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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2 조선통신사


1719년 통신사로 일본 에도에 다녀왔던 신유한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詩)와 문장을 구하려고 한다. 그것을 얻은 자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그것을 우러러보기를 신명(神明)처럼 하고 보배로 여긴다.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들이라도 조선 사람의 해서(楷書)나 초서(草書)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한다. 소위 문사(文士, 글을 읽는 사람)라 하는 자는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역(驛)이나 관(館, 숙소)에서 기다려서 하룻밤 자는 동안에 종이 수백 폭을 소비하고 시(詩)를 구한다. 그것을 얻지 못하는 자는 비록 반줄의 필담이라도 보배로 여겨 감사해한다. (중략)

그들은 평소에 조선을 높이 사모하기 때문에, 대관(大官)이나 귀인은 우리의 글을 얻어서 자랑 거리로 삼고, 서생(書生, 지식인)들은 명예를 얻는 길로 삼고, 낮고 천한 자는 구경거리로 삼는다. 우리가 글을 써 준 뒤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 달라고 청하여, 진짜인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항상 이름난 도회지나 큰 고을을 지날 때에는 그들을 응접 하기에 겨를이 없었다.”(<해유록>)


조선통신사로 갔다가 일본 사람들이 글을 받으려고 줄지어 찾아온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의 글에는 이런 것도 있다.


“오사카에 머무는 5일 동안 서생(書生) 10여 명과 늦은 밤중까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을 돕는 아이에게 먹을 갈아 놓고 기다리게 하여 날마다 정신이 없었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 각기 성명ㆍ자ㆍ호를 써서 뒤섞어 들이는 것이 눈에 해괴한 것이 많고, 그들이 지은 시(詩)도 치졸(稚拙)하여 읽을 수 없었다. (중략) 오사카에서는 글을 청하는 자가 다른 곳보다 배나 많았다. 가끔 닭이 울도록 자지 못했고, 음식을 놓고도 입에 넣었던 것을 토할 정도로 분주했다. 응대의 괴로움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마도의 왜인들이 막아서 들어오지 못한 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신(조선통신사)의 숙소가 깊고 엄중하여 소위 찾아온 사람이 만약 초라하고 낮은 평민의 무리라면 법에서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만나게 해서 통역을 해주거나 접근 금지하는 것을 주관하는 것도 권한이 대마도에 있었으므로 전부터 대마도 왜인이 중간에 조정하여 뇌물을 요구하는 폐단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해유록> 9월 4일자)


이렇게 문화교류도 겸했던 조선 통신사는 1420년에 시작해서 1811년까지 이어졌다. 400년 가까이 파견되었으니 미국 역사보다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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