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가 일본 사무라이를 만날 때>
<조선의 선비가 일본 사무라이를 만날 때> 8-9쪽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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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3 공주의 우금치 전투
1894년 11월 9일, 충남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봉준 장군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 약 2만 명이 일본군 2,000명과 조선의 관군 3,000여 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공격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동학난을 빌미로 서울에 진입하여 대원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학군은 이에 항의하여 모인 것이다.
동학군은 죽창과 농기구,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신식의 소총과 대포,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동학군은 당시 일본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도 잘 알았고, 동학군 주변에는 별도로 수만 명의 동학군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에도 동학군 지도부는 특별한 계획도 없이 공격을 감행하여, 4일간 벌어진 이 전투에서 동학군은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고, 겨우 수백 명이 살아남았다.
그때 이야기는 아니지만, 청일전쟁 당시 홍주(충남 홍성군)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이 자기 형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적군(농민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적은 앞 다투어 어지러이 진격해 왔다. 400m까지 다가오자 세 방면에 포진한 우리 부대가 먼저 저격을 시작했다. 백발백중이다. 실로 유쾌했다. 적은 오합지졸의 주민, 공포감으로 전진해 오지도 못하고.(이날 3,100여 발을 쏘았다)”
‘오합지졸의 주민’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3,000발 넘게 쏘았다고 하니 수천 명은 되었을 것이니, 그 안에는 글 읽는 선비도 있었을 것이고 동학의 접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치에서도 홍주에서도 ‘선비’들은 전쟁을 전혀 몰랐다. 이러한 잘못은 결국 조선의 멸망과 일본의 식민통치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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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이트에 이 글을 올렸더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단언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지금은 일본 애들이 전쟁을 모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베가 헌법을 고치면 징병제 부활할 것 같네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하고 싸울 수 없기에) 우리나라 남자들은 대개 군대 의무복무를 하였고 월남전 참전 경험도 있고, 북한하고 휴전하면서 60년 넘게 전투준비를 해왔으니..... 옛날 '선비'들과는 다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의 선비들과는 다릅니다. 전쟁도 알고 무기를 잘 다루고 또 훌륭한 무기를 생산해서 전 세계로 수출까지 합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임진왜란 때 그렇게 당하고서도 300년 뒤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되면서 민족이 둘로 갈라져 전쟁을 했으며 지금도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해방된 지 아직 100년이 안 지났습니다. 200년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