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의 세계를 떠나 본질의 세계로
파리 개선문 건너편, 샹젤리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사무실.
대기업 파리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제 책상은 서울의 그 어느 곳보다 근사했습니다. 화려한 오스만 양식의 층고 높은 사무실, 회사가 마련해 준 집, 차, 그리고 주재원이라는 사회적 안전장치.
업무는 잔인하리만큼 고됐지만, 워낙 익숙했기에 저 역시 큰 불만은 없었습니다. 서울의 동료들도 제 삶이 마치 넷플릭스 시리즈 '에밀리, 파리에 가다' 같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제 주재원 임기가 끝나갈 무렵,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본사나 다른 나라로 발령날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 남아 홀로 서기할 것인가.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건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이었습니다. 익숙한 업무, 보장된 대우, 그리고 어디를 가든 보호받는 삶. 하지만 저는 회사가 건네준 비행기 티켓 대신 사직서를 택했습니다.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 좋은 기회들을 걷어차느냐고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 안락함이 오히려 성장을 멈추게 하는 마취제처럼 느껴졌습니다. 회사라는 거대한 배에서 나와, 이 글로벌 마켓의 바다에서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15년, 저는 서울이라는 정글에서 '효율'을 제1 목표로 두고 살았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예산 대비 최대 효과를 뽑아내는 것,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업무를 해내는 것, 트렌드를 누구보다 빨리 읽어내는 것 등등. 그것이 마치 제 유능함을 평가하는 기준같았고, 저는 그 게임의 승리 공식에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도시의 문법이 달랐습니다. 이곳의 브랜드들은 '얼마나 많이, 빨리 파느냐'보다 '얼마나 오래 남느냐'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으니까요.
주재원 생활을 하며 마주한 유럽의 럭셔리 하우스들은, 서울의 시선으로는 해석되기 어려운 비효율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비효율이 쌓여 대체 불가능한 아우라가 되고, 그 아우라가 고객의 마음을 열게 만들더군요.
서울이 100m 달리기라면, 파리는 수백 년을 보고 달리는 마라톤 같았습니다. 그간의 경력으로 다진 '효율의 근육'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주재원 명함을 달고 있는 한, 저는 그들의 진짜 게임에 낄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파리지앵들과 비즈니스를 논했지만, 저는 그저 잘 훈련된 관찰자(Observer)일 뿐, 그 판의 플레이어(Player)가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파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비즈니스의 정수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한국 브랜드들이 유럽의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이유, 반대로 이곳의 브랜드는 영원히 늙지 않는 이유. 그 속성을 알지 못하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안전한 궤도를 이탈했습니다. 막상 제 돈을 태우며 타국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하니, 낭만은 사라지고 냉정한 현실만 남더군요. 제가 알던 마케팅 지식은 반쪽짜리였습니다. 분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어요. 저는 '파는 법'은 알았지만, '지속가능하게 살아남는 구조'를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비즈니스를 하면 할수록, 이 땅에서 그 본질을 발견하고 싶은 허기가 커졌습니다.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ESSEC 비즈니스 스쿨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러 전공 중 글로벌 럭셔리 매니지먼트를 택했는데, 이유는 첫째, 뉴욕 파슨스와의 복수학위를 통해 디자인과 경영을 융합한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점. 둘째, 전 세계 럭셔리 비즈니스의 현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여러 도시를 오가며 낮에는 치열한 창업가로, 밤에는 처절한 학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가끔 저도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헛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가장 안전한 명함을 버린 대가로, 저는 매일 불안과 싸웁니다. 하지만 확신합니다. 이 불안함이야말로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을요.
앞으로 저는 이 야생의 한복판에서, 제가 관찰하고 익힌 브랜드의 속성, 진정한 럭셔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이론이 아닙니다. 파리의 거리에서, 비즈니스 현장에서, 그리고 장인의 아틀리에에서 직접 부딪히며 찾아낸 생존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