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인 니치향수’, 조말론의 모순적인 매력

by 퍼퓸그라피

진부하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 말은 보통 대꾸하는 쪽에서 나오는데,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는 게 일반적이다. 기대했던 무언가가 너무 뻔할 때나 특별한 감흥이 없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니까. 하지만 진부함이 꼭 나쁜 걸까?


수없이 반복됐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좋아하고, 그래서 오래도록 곁에 두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딱딱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검증을 거친, 보편성이나 대중성을 갖춘 무언가라는 뜻이니까. 예를 들면 로맨틱 코미디의 구조, 대중가요의 코드 진행, 잘 짜인 광고 카피 같은 거 말이다. 그게 브랜드든, 콘텐츠든, 인간관계든 새롭게 시작하는 입장에서 ‘신뢰’와 ‘안정감’만큼 얻고 싶은 게 또 있을까.


역시는 역시, 명불허전, 베스트셀러.


제품과 브랜드에 가치를 더하는 일을 하면서 수없이 써온 이 수식어를 다른 말로 바꿔보려고 해도, 이보다 좋은 게 잘 없다. 이 진부한 칭찬의 말 속에도 부정할 수 없는 진부함의 힘이 있다. 그 오랜 시간과 선택 속에 살아남은 존재에게는 내가 더할만한 가치가 따로 없다. 그게 바로 조말론을 떠올릴 때 드는 생각이다.


“아, 조말론? 좋긴 한데 너무 흔하지 않아?”


처음 맡았을 때보다 다시 마주쳤을 때 더 오래 남는 향기가 있다. 평범하고 익숙해서 쉽게 지나쳤던 그 향.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자주 꺼내 들게 되는 건 늘 그런 향이다. 조말론은 오래전부터 그런 향을 만들어왔다. 기발함보다 견고함, 신선함보다 안정감을 택하는 방식.


조말론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향을 몇 개만 꺼내봐도 알 수 있다. 라임 바질 앤 만다린, 블랙베리 앤 베이, 우드 세이지 앤 씨솔트, 잉글리쉬 페어 앤 프리지아. 어쩌면 이 향들은 너무 익숙해서 설명조차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직관적인 이름으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원물의 향기에 그들만의 섬세한 조향을 더한 게 바로 조말론의 능력이다. 어쩌면 진부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는 노선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기억했다.


싱싱한 라임과 만다린을 한 박스씩 가져온다고 해서 누구나 더운 날의 피로감이 가시는 청량한 시트러스 향수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잘 익은 배를 따다 예쁜 프리지아로 감싸서 이토록 투명하고 달콤한 여인의 향을 만들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


익숙한 것들끼리 만나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선택의 문턱을 낮추었고, 이 향수를 집은 이들이 나만의 특별한 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레이어링을 권했다. 존재 자체가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끔 개인의 공감을 갱신하는 기술을 썼다. 조말론이 선택한 익숙함은 무수한 반복 끝에 완성된 조율의 결과이며, 변덕 많은 취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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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론을 처음 만났을 때를 아주 선명히 기억한다. 20대 중반, 혼자 떠났던 런던 여행에서 정말 ‘영화처럼 우연히’ 조말론을 만났다. 이 이야기의 도입부조차도 진부하게 들린다만, 사실이 그렇다. 소호(Soho) 거리의 뮤지컬 공연장 앞에 혼자 온 관람객은 나와 그 사람 둘이 다인 것 같았다. 기념사진을 남기려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탁하려는 차에 우린 서로가 한국 사람인 걸 알게 되었다.


런던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보내고 있는 친구였는데, 놀랍게도 조말론 매장의 직원이었다. 휴무일에 벼르던 뮤지컬을 보러 왔고, 우린 그다음 휴무일도 함께 보냈다. 어제 만난 곳 근처의 차이나타운에서 버블티를 마시며 오래되지 않은 향수병을 달래기도 하고, 포르투갈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복스홀(Vauxhall)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그 여행의 최애가 된 문어 요리를 먹어보기도 하고, 길가에 핀 무궁화를 보며 의아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헤어지는 길에 그가 건넨 9ml짜리 조말론 향수 미니어처가 나에겐 가장 큰 ‘스몰 럭셔리’였던 시절이다.


‘조말론’이라는 이름만 알고 향기는 모르던 시절, 향수의 매력에 빠지기 전 우연히 맡았던 그 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조말론 향수는 이런 거구나 생각하게 된 ‘잉글리쉬 페어 앤 프리지아’. 과하지 않고 단정하게 맑았고, 그래서인지 자꾸만 다시 떠올랐다. 지금 돌아보면 나의 취향이 조용히 시작된 지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 비싼 향수 좋아하네? 생각했던 흐름은 좀 터무니없지만, 럭셔리했던 가격이 아니라 조말론의 향기가 내 마음을 건드린 거였다. 이 향수들이 사랑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검증된 향이라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에도 오래 남는 향이라는 뜻이니까.


조말론의 수많은 라인업 중에 특별히 그 향을 골라 온 건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평범한 일상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그 하루의 냄새. 조말론을 제대로 알게 된 후엔 ‘분명 처음 맡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새롭고 세련된 향’이라는 말이 시향할 때마다 튀어나왔다. 이렇게 표현력이 부족한가 싶어 스스로 꿀밤을 먹이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함을 만드는 조말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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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말론을 처음 만났을 때, 아주 좋은 사람이 우릴 이어준 것 같다. 라임 바질 앤 만다린, 블랙베리 앤 베이,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넥타린 블로썸 앤 허니, 그리고 잉글리쉬 페어 앤 프리지아. 많은 이들이 처음 만나는 조말론 향수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한다. 계절이 바뀔 때, 옷장에 셔츠를 꺼낼 때, 창문을 열고 나가는 아침. 그런 익숙한 찰나에 어울리는 향들이다. ‘평범해서 더 특별한 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조말론의 상징적인 라인업이 모두 베스트셀러에 자리하고 있다.


조말론은 향을 감정, 시간, 순간으로 포장하는 데 능숙하다. ‘한 잔의 얼그레이를 마시는 순간’, ‘해변을 거니는 느낌’ 같은 감각적 메타포를 통해 감정과 향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래서 향 자체보다도 그 ‘향이 떠오르게 하는 장면’에 반응하게 되는 것 같다. 니치향수라는 명명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소유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여름마다 새롭게 나오는 라인업 같은 거다. 지나가는 계절을 붙잡는 재미를 놓치기란 나 같은 사람에겐 쉽지 않다. 기억 속, 추억 속, 그 계절의 향기를 다시 입을 때마다 그 시절의 나를 잠깐 불러오곤 한다.


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라면 더욱이 마니아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조말론이 의도한 나만의 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가장 잘 따라가고 있는 이들일지도 모르겠다. 오드 앤 베르가못, 머르 앤 통카, 잉글리쉬 오크 앤 헤이즐넛. 이 세 가지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결국 돌아오게 되는 향’으로 손꼽힌다. 의외의 조합을 우연히 만나 이제 다른 향은 입을 수 없게 되었다는 그들의 웃지 못할 이야기는 꾸준한 판매량으로 증명된다.


우리가 ‘진부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향수는 이미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일상 속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조말론의 위치다. 익숙해서 무심히 지나쳤지만, 다시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는 향들. 그리고 그 익숙함 속에 숨겨진 이유를 발견해 보면 말을 아끼게 된다.


조말론이 흔해졌다고 느끼는 건, 우리가 그 향을 충분히 사랑했기 때문 아닐까?

또다시 오고야 마는 계절을 매번 의문도 없이 끌어안는 것처럼, 이 흔한 사랑에 또 한 번 새롭게 매료된다. 역시는 역시. 오랜 시간 사랑받은 명불허전, 베스트셀러 조말론의 모순적인 매력에 오늘도 별 수 없이 반해버리고 만다.



Editor. Sonior

향수 브랜드 에세이를 기록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향수는 퍼퓸그라피 홈페이지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