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만원짜리 고급 오마카세의 오너 셰프가 들려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들었다. 오픈형 주방을 마주 보고 있는 일자형 식탁, 일명 다찌석에 앉은 손님에게 메뉴를 내어주다가 끓는 음식에서 튀어 오른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가 손님의 가방 위로 안착했다고 한다. 그는 노발대발하는 손님을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직원을 따로 불러 ‘내가 변상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던 일 하러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상황극은 대략 이렇게 줄일 수 있겠다.
“왜 이렇게 기가 죽었어! 내가 물어줄게! 그 손님 가방 얼마야!”
“셰프님… 2천만 원짜리 가방이래요.”
“뭐? 당장 손님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싹싹 빌자.”
오너 셰프는 그때 에르메스 가방의 가격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10대 때 향수를 통해 ‘에르메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나는 그 브랜드 매장이 백화점 1층 명품관에 있던 게 신기했더랬다. 에르메스가 샤넬 같은 브랜드였냐고- 가방을 먼저 알았다면 향수를 보고 놀랐을 텐데, 순서가 반대로 바뀌어도 어쨌든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만난 향수는 에르메스의 그 유명한 정원(Un Jardin)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잘 팔리는 ‘수르닐(Sur le Nil)’이라는 제품이었는데, 당시 100ml 용량이 10만 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물론 지금도 브랜드의 명성에 비해서는 굉장히 저렴하다. 덕분에 나는 10대 때부터 에르메스 오너였다는 점. 이를테면 샤넬의 립스틱 같은 포지션이다. 에르메스 제품 중에 가장 싼 게 향수거든.
이름값이라는 게 존재하지만, 눈을 가리고 골라도 이 향수를 선택하겠다 싶을 만큼 향 자체가 좋다. 튀는 구석 없이 향기로운 에르메스 향수가 대중성을 다잡은 비결은 그 누구에게나 익숙한 자연의 향을 ‘자연스럽게’ 담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션 브랜드들은 향수를 출시할 때 저마다의 아이덴티티를 뽐내기 위해 ‘스치면 딱 아는’ 강렬한 인상의 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그중 유일하게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자신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들만의 우아함을 분명히 전달하는 향. 이 미니멀한 고급미가 에르메스의 강점이 되었다.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은은한 향조는 조향사 장-끌로드 엘레나의 손을 거쳐 에르메스의 상징이 되었다. 2005년 첫 출시부터 20년이 되도록 시들지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운 자르뎅 수르닐’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나 이런 향수요’하고 말해주는 듯한 보틀 디자인부터 가볍고 맑은 향기까지- 여름날에만 느낄 수 있는 생기와 평온감을 긍정적으로 전해준다. 상큼한 시트러스와 그린 망고, 신선한 토마토와 당근. 자연 그 자체의 재료에서 은근한 달콤함을 찾아내고, 거기에다 연꽃과 각종 풀꽃의 그리너리한 플로럴을 더해 놀랍도록 매력적인 향을 만들었다.
전혀 다른 느낌의 자연도 어김없이 미니멀하게 잘 담아낸다. 바싹 마른 흙길을 여유롭게 걸을 때, 저 멀리 벤치에서 쉬고 있는 누군가가 오렌지를 까먹는 장면.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그 순간에 어떤 향기가 나는지 생각해볼 일도 없다. 그만큼 자연스럽고 거부감 없는 땅과 소나무의 향을 섬세하게 담아낸 향수가 바로 ‘떼르 데르메스’되시겠다. 아주 오래 전의 애인이 이 향수를 뿌렸다던 내 친구는 ‘있을 땐 몰랐던 소중함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 같은 향’이라던데, 아직까지도 그 향수를 재구매하는 이유가 어떤 소중함 때문인지는 묻지 않았다. 크흠.
남녀노소 누구에게 선물해도 실패 없을 만큼 부드럽고 무난한 에르메스 향수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2023년 수석 조향사 크리스틴 나겔의 합류 이후부터다. 그녀의 첫 작품 ‘H24’는 무려 15년 만의 신작이었는데, 엘레나와 다르게 인공적인 합성향료를 주로 사용해서 기존 라인업보다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매력을 극대화했다.
갓 자른 허브의 향이 나는 클라리 세이지와 수선화, 건초의 깨끗한 풀 내음이 굉장히 그리너리하고 산뜻하다. 거기에 ‘쇠 냄새’라고도 불리는 금속의 날카롭고 세련된 느낌이 더해져서 남성적인 시원한 무드를 만든다. 클래식하면서도 깔끔한 향기로 ‘에르메스에서 작정하고 만든 향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후문이. 향의 뉘앙스는 새로웠지만 에르메스가 가진 미니멀한 고급스러움 자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에르메스는 한 번도 나에게 ‘취향’을 강요한 적이 없다. 그저 익숙한 향기, 자연스러운 밀도, 단정한 인상을 건네왔을 뿐이다. 자연에서 비롯한 창의력과 거침없는 대중성을 두루 갖춘 향기는 계절의 공기처럼 다가온다. 언제나 익숙하지만, 매번 다른 장면을 통해 찬찬히 스며드는 방식으로. 그래서 에르메스는 누군가에게는 첫 향수가 되고, 또 누군가에겐 계절마다 꺼내어 쓰는 오래된 습관이 된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되, 누구의 것 같지는 않은 향의 정체성이 자연의 너그러움과 다를 것이 없다. 사계절의 색을 은은하게 담아내듯, 향으로 그려낸 에르메스의 계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진 출처=에르메스 공식 홈페이지)
Editor. Sonior
향수 브랜드 에세이를 기록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향수는 퍼퓸그라피 홈페이지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