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빛이 루시아의 빛으로.
2018년, 선진지 학교 방문을 위한 국외 연수길에 올랐다. 노르웨이를 거쳐 마지막 경유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1박 2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보다 내 마음을 거세게 흔든 곳은 뜻밖에도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동네에서 흔히 보던 평범한 교회 건물과는 차원이 달랐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규모와 고귀한 보물들은 나를 단숨에 매료시켰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양식의 아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쏟아지는 신비로운 빛은 경외감 그 자체였다. 때마침 시작된 미사에서 미사포를 쓴 채 기도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더없이 성스럽고 고귀해 보였고. 그 정경을 바라보며 나는 막연하지만 단호한 결심을 했다.
'언젠가 종교를 갖는다면, 반드시 성당에 다니겠노라'라고.
사실 여기에는 교회에 대한 해묵은 반감도 한몫한 것도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시어머님은 지금도 우리 가족이 교회를 다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계신다.
연애 시절, 남편은 단 한 번도 교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기독교 집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결혼을 결심하고 첫인사를 드리던 날, 어머님은 모태신앙임을 밝히시며 다니고 계시는 교회 목사님께 주례를 맡겨야 한다고 못 박으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첫 만남부터 거절할 수 없어 함께 찾아간 교회에서 목사님은 단서를 다셨다.
주례를 받으려면 내가 지금 신자가 아니니 결혼 전까지 매주 성경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기도에서 근무하던 내게 주말마다 장거리를 오가며 소중한 휴식 시간을 할애하라는 요구는 무리였다.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강요와, 오랜 교인인 어머님 아들의 결혼식에 조건부 주례를 내세운 목사님의 편협함에 난 깊은 화가 치밀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손윗 형님의 한마디였는데, 명절마다 마주치는 형님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나에게 못마땅해하며 다그쳤다.
"자네, 그러다 지옥 갈 건가?"
믿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 서슬 퍼런 이분법적 논리는 나를 질리게 했다. 그런 폐쇄적인 믿음의 강요는 오히려 내 안에 '절대 교회는 가지 않겠다'는 오기를 심어주었다.
성당에 가고 싶은 마음은 품고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세 아들의 육아와 직장 생활에 치여 주말이면 그저 쉬고만 싶었기에, 종교 생활을 시작하기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2020년 상반기, 근무지를 옮기며 겪은 인간관계의 갈등과 회의감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졌고, 비로소 나는 종교라는 안식처에 기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당시는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시기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성당은 새로운 신자를 받지 않았고, 그렇게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올해 3월, 독서 동아리 지인의 인도로 집 근처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들였으나 과정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수요일 저녁마다 교리를 배우고 마태복음 성경을 필사하며, 주말 미사 참석은 필수였다.
특히 7월에 섬으로 발령을 받은 후로는 매주 주말마다 육지로 나와 새벽 6시 반 미사를 드리고, 허기를 참아가며 교리 공부를 이어가야 했다.
체력적인 한계보다 더 큰 내적 갈등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개신교의 십일조 같은 제도가 성당에는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매년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교무금' 책정서를 써야 했고, 성당의 큰 행사나 시설 교체가 있을 때면 신부님은 노골적으로 신자들에게 도움을 청하셨다. "2만원 이상 내라"는 구체적인 권고와 매주 미사 때마다 돈 봉투를 들고 나가는 신자들의 행렬을 보며 '돈 없으면 성당도 못 다니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매달 빠듯한 생활비 걱정이 앞섰지만, 그럼에도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며 읊조리고 나면 한 주 동안 밉고 서운했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에 돌아와 그 말을 신랑에게 했을 땐 웃으며
"맞아. 니 탓이니 나한테 잘하라"며 짓궂게 농담을 던졌다. 이렇게 미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느껴지는 평온함과 마음의 위안은 커피 한 잔, 좋아하는 빵 한 조각 값을 아껴서라도 지켜낼 가치가 충분했다.
그렇게 9개월간의 긴 여정 끝에 지난 12월 14일, 나는 드디어 '루시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 난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따르며, 그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겠다는 내 신앙의 다짐으로 루시아라는 세례명을 정했다.*
이렇게 순백의 미사포를 쓰기까지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이제 나는 다시 노트르담 성당에 간다면 그토록 꿈꾸던 미사에 당당히 참여할 수 있고, 국내 어디를 여행하든 성당을 찾아가 평화를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미사포를 쓰고 나면 조금 더 순수한 마음으로 착하게 살고 싶어진다. 어떤 잘못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든든함도 생긴다. 성탄 전야를 맞아, 내가 동경하던 성모 마리아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투영하며 나는 다시 성당으로 향한다.
"모두에게 평화를 빕니다."
그리고 남몰래 모아놓은 비상금을 털어 구유 봉투와 성탄 축하 봉투를 채운다. 그러고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 귀여운 투정 섞인 기도를 건네본다.
"예수님, 평소보다 봉투를 훨씬 두툼하게 채운 거 아시죠?^^
제 마음 헤아리셔서 은총과 더불어 돈복도 가득가득 내려주세요!
생신 축하드려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