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감사 이사님의 주말 냉장고

1. 무

by Lee S

내 친구 땡땡이가 나에게 묻는 말이 있다.

주말에 나 뭐해먹어?

나의 답은 늘 똑같다.

냉장고에 뭐 있어?


주말 아침,

평일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회의도 없고,

감사 대응 메일도 잠시 멈춘 시간.

이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늘 같다.


무.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항상 제자리에 있는 재료.

마치 회사에서의 전산감사처럼.


무로 할 수 있는 요리는 굉장히 많지만 내가 주로 하는 요리는 몇 개다. 하지만 그만큼 검증된 맛이며 가족들이 좋아하는 메뉴라는 건 진실.


무국 (소고기무국)

무된장국 (배추 + 소고기)

무조림 (집에 있는 생선으로 변형 가능)

무생채 (비빔밥 재료로 변형 가능)

무나물 (비빔밥 재료로 변형 가능)

무밥 (버섯, 소고기 간 거)

무피클 (양배추, 당근 같은 자투리 채소 함께)

육수 내어두고 냉동 (무어묵탕, 된장국 활용)


평일의 나는

감사 관련 이슈를 선생님들과 같이 논의하고,

조서를 리뷰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업무 기회를 위한 제안서를 작성하고,

스케줄과 예산을 고민한다.


그리고 주말의 나는

무를 본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손이 가는 재료는 늘 단순하다.



무는

계획적인 재료다.


국을 끓이면

월요일 아침까지 간다.

조림을 해두면

바쁜 저녁에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채로 만들어 두면

밥상이 허전할 틈이 없다.


전산감사와 닮았다.

잘 준비해 두면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문제가 없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무를 썰면서 생각한다.


이 재료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좋다.

양념을 받아들이고,

국물의 맛을 정리하고,

옆에 무엇이 오든 조화를 이룬다.


감사 대응 담당자도 그렇다.

앞에 나서기보다

흐름을 정리하고

문제가 커지지 않게 만든다.


칭찬받을 일은 적지만

없으면 바로 티가 난다.



주말에 무를 손질하는 이유는

요리를 잘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평일의 내가

조금 덜 지치게 하려는 마음이다.


보고서 마감과

중학생 아이의 일정 사이에서

저녁 메뉴까지 고민하지 않기 위해

주말에 미리 준비해 둔다.



냉장고에 무가 있으면

한 주가 조금 안정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확신.


전산감사 이사의 주말 냉장고에

오늘도 무가 있는 이유다.



다음 편에서는

냉장고 속 또 다른 생존 재료,

달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주말에만 요리하는 사람에게 달걀은 거의 전략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