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적어 본다는 것
글쓰기도 좋은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겠지
일기를 쓰곤 했다. 자아성찰의 개념에서 훌륭하지만, 뭔가 내밀한 개인적인 것으로만 끝내기에는 내 안에 차 있는 무엇인가가 해소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누구나 소통을 원한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존재론적으로 소통은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닌 신체 기관은 외부와 구별되는 독립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있는 창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굳이 깊이 따지고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것이 감정이 됐든 정보가 됐든 무엇인가 주고받는 것을 필연적으로 원할 수밖에 없다.
모친이 계신다. 의료 사고로 청력을 잃으셨다. 인공와우 수술을 하셨지만 재활을 제대로 못 했던 탓일까, 외부의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신다. 듣는 것만 안 돼도 힘든데, 신경계통의 문제로 머릿속이 울리는 소리, 뭔가 째지는 소리 등이 수시로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나 역시 결혼을 했고 분가해서 살아가기에 가끔씩 찾아뵙는 것 말고는 특별히 만남을 갖기가 어렵다. 요지는 외부와의 소통이 제한적이다 보니 모친의 정서적 육체적 건강이 매우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다양한 예시를 들 수 있겠지만 직접적인 경험만큼 확실히 와닿는 게 얼마나 되겠는가, 나 역시 뭔가 털어놓고 외부와 소통하고픈 마음이 꿈틀대고 있었다. 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설이 길어지는 거 같아, 간략히만 써 보자면 일단 집에 나만의 공간이 없다. 30년 넘게 독방을 써온 시간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회사 일 끝나고는 대학원에 가고, 집에 있는 날이면 집안일과 육아에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와이프와 대화가 잘 되는 편이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함을 느낀다. 모두 핑계인 걸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다른 성향과 조금은 다른 가치관, 서로의 역동이 작용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보니 속 시원하게 공감으로 이뤄지는 대화가 쉽지만은 않다. 욕심이 너무 큰 걸까?
물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많은 이들에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닌 시대적 상황에서, 평범한 것이 결코 평이하게 이뤄질 수 없는 것임을 재차 확인하는 오늘날, 나는 배가 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살다 보니 각자 제 갈길을 가는 형제들과 친구들과도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 같아 어쩔 때는 사뭇 아쉽게 느껴진다. 그게 나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내가 필요할 때 부담 없이 연락할만한 존재가 있으면 어쩔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건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가 아니고선 찾기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브런치 글을 읽게 되었다. 뭔가 에세이 같은데 굳이 찾아보려고 하지 않은 것이 툭 튀어나와 보니, 뭔가 가벼우면서 일상을 잔잔히 공유한다는 느낌이 들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래 그간 책을 너무 멀리하고 살았다. 활자랑 나름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애를 쓰지 않으면 책을 가까이할 일이 없다.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이 내 독서의 전부인 나날들.
책을 읽는 것도 소통과는 거리가 있다. 책과 대화를 한다는 것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책이 구체적인 피드백을 나에게 준다? 일정 부분 공감한다.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고 나 역시 비슷한 경험들이 있으니
그런데 즉각적인가? 그건 아니다. 뭔가 답답함을 뻥 뚫어줄 소통의 대상이 필요할 때 책은 애매하다. 일기도 애매하다. 애초에 그런 목적이라면 대상 설정 방향이 잘 못 된 것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공개된 장소에서의 글쓰기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 부분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것 같다. 마치 익명의 상담 전화로 내 얘기를 쏟아 내는 듯한 느낌이랄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브런치에서 첫 글쓰기이다. 회사 점심시간, 텅 빈 사무실에서 나 홀로 식사를 마치고 뭔가에 홀린 듯 글을 써내려 간다. 뭔가 내 이야기를 쏟아 낼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30대 초반에 SNS를 다 삭제하고 활용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나에게는 너무 소모적이고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업에 종사하면서 의도치 않게 다시 SNS를 활용하게 되었고, 그 안에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결국 '광고'라는 말로 환원될 만한 것들로 점철된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뭔가 그런 현장은 나를 매우 피로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과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애처로움과 동시에 환멸의 감정이 일게 했다. 외근을 나가거나 등하교하면서 내 얘기를 쏟아내는 창구로 틱톡을 활용 중인데 그건 나름 유용했다. 그래도 애초의 목적이 계정 활성화를 위한, 비즈니스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일까, 인스타나 블로그도 진실된 내 얘기라기보다 의무적인 작성들로 인해 지쳤던 것 같다. 무엇인가 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또 그것에 내 가치와 신념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라면 흥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고, 지속성을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
벌려 놓은 일들이 많다. 뭐 하나 제대로 흘라간다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되어 갈 것이라는 다소는 낙곽적인 관점으로 조급함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어설퍼 보이고, 하다가 말아버린 애매한 것들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근사한 것들로 서로 자리를 맞춰가길 희망한다.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중구난방으로 써 내려가다 보니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한 바탕 거칠게 뭔가를 써 놓고 나니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