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과 나

김제철

by 김주영

15년 전, 아내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칭따오에 간 적이 있다. 마침 도착한 날이 정월대보름이었다. 항구에 내려 시내를 향해 차츰차츰 걷고 있는데 고층건물 사이에서 쾅! 쾅! 폭죽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커다란 소리에 크게 놀랐는데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가게들이 즐비한 시내를 지날 때였다. 은행 직원들이 가로수에 폭죽을 걸고는 담뱃불로 불을 붙였다. 곧이어 따발총 같은 소리를 내며 폭죽이 파바박 팡 터졌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화약 연기와 그 잔해물들이 널려있었다. 밤이 가까워질수록 폭죽소리는 더 폭발적이었다. 보름달이 뜬 어두운 밤에는 칭따오 전체가 불꽃의 도시로 변했다. 차가 다니는 도로 중앙에서 거대한 불꽃을 쏘아 올리는가 하면 길가에 쭈그려 앉아 자루에서 종이 같은 걸 꺼내 태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큰 폭죽의 진동으로 자동차 경보음도 울렸다. 사람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보였다. TV에는 정월대보름을 기념하는 대규모 공연이 나오고 있었다. 중국에게 정월대보름은 이렇게 큰 날이구나 싶었다.


얼마 전 정월대보름이었다. 농촌임에도 불구하고 정월대보름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몇몇 마을에서는 윷도 놀고 밥도 먹었지만 대부분의 마을은 조용했다. 내가 사는 마을은 해마다 지신밟기와 달집 태우기도 했었는데 올해는 산불 우려 때문인지 조용히 넘어갔다. 점점 촌에 사람도 없기도 한 이유도 있겠지만 요즘 시대에 정월대보름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구순이 넘은 어르신은 정월대보름인데도 사람들이 직장에 출근하는 게 의아한가 보다. 어르신들에게 정월대보름은 어떤 날이었길래 그런 생각까지 드는 걸까 궁금하다.


우리나라도 정월대보름은 큰 날이었다. 명절인 설날보다 더 큰 잔칫날이었으니 모두들 기다리는 디데이였다. 이 날은 낮부터 윷놀이하며 신나게 놀고 밤에 달구경하며 하루 종일 노는 날이었다. 윷이 나와 막걸리 한잔 하고 모가 나와 한잔 하며 취하는 날이었다. 대보름 전날 열나흘날에 오곡밥을 지어먹고 대보름 날 아침에는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럼을 깨문다. 부럼은 땅콩 같은 견과류도 있지만 사탕을 깨물다가 뱉기도 했다고 한다. 부럼을 깨무는 이유는 종기 같은 피부 부스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해뜨기 전에 이집저집 다니면서 “아무게야 내 더위 사가라”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내 더위 사가라고 해서 꾸지람을 받기도 하는 날이었다. 밥 아홉 그릇 먹고 나무 아홉짐을 지는 날.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신발을 엎어놓기도 하고 아침에는 김치를 안 먹었다는 미신도 있다. 아침밥 첫 숟가락을 김을 싸서 먹었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게 올해 한 해 벼농사 잘되게 건강하게 잘 풀리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 기운을 첫 번째 크게 뜨는 달에 실려 보냈다.


쥐불놀이는 정월대보름에만 하는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놀았다고 한다. 논두렁 여기저기에 불을 내기도 하면서. 그때는 산에 나무도 없고 논에도 아무것도 없어 큰 불로 이어지진 않았다. 또 간생이라고 둥그렇게 서서 손을 잡아당겨 노는 놀이도 했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밤에는 마을에서 달을 보거나 달 뜨는 거를 빨리 보기 위해 마을 동산 꼭대기에 올라 농악을 치며 달을 봤다. 칠성면에는 달구경 하기 좋은 곳이라 하여 월경이라 불리는 곳도 있다. 달을 보며 비나이다 하며 빌기도 하고 쥐불놀이를 하며 달을 향해 던지기도 한다. 설에서 대보름 날까지 연도 날렸는데 대보름에 연에 글씨를 적어 하늘로 날려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날만큼은 밥도 떡도 나눠 먹는 날이었다. 다 같이 어려운 처지라 이웃 간에 우애가 있고 정이 살아있었다. 어른들이 늘 해오던 풍습을 계속 이어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달도 안 보고 자고 빌지도 않는 날이 되어버렸다.


가끔 궁금한 게 있다. 옛날 사람들이 더 행복했을까? 요즘 사람들이 더 행복할까? 어르신들은 밥 굶지 않고 풍요로운 세상에 살면서도 그때가 더 재밌었다고 한다.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만 보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들의 온갖 감정이 뒤엉켜 몸끼리 부딪혀 살았던 리얼 오프라인 시대. 그 안에 인생의 즐거움이 있었고 생동감이 있었으리라. 이번 정월대보름 보름달은 특별히 36년 만의 개기월식이었다. 지구 그림자가 달을 딱 가리는 날. 지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일깨우는 묘한 날이었다. 정월대보름을 기점으로 농사도 일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느낌이다. 웅크렸던 어깨를 피고 올 한 해도 안녕을 빌며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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