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보다 먼저, 사람을 만난 아침
어제 오전, 진주여성민우회 독서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랜만에 딸과 함께 참여한 모임이었습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딸 바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약속이든, 어떤 일정이든 늘 먼저 딸에게 묻습니다.
“아빠랑 같이 가볼래?”
그날도 그렇게 동의를 구하고서야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지요.
아침 빨래를 돌리고, 집안을 한 번 쓸고 닦고, 쓰레기를 버리고 나니 이미 모임 시작 시간은 조금 지난 뒤였습니다.
서둘러 평거동으로 향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나의 삶이고, 이 상태 그대로 책을 읽는 게 맞겠다.”
세계사 책을 펼쳤지만, 우리가 읽은 건 ‘각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함께 읽은 책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세계사"였습니다.
제목처럼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대에서 중세, 근대와 현대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을 단정하고 명료하게 짚어 주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서모임에서 오간 이야기는
연표나 사건 정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을 보니까 요즘 뉴스가 떠올랐어요.”
“학교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에게는 이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 주면 좋을까요?”
책은 분명 ‘세계사’였지만,
우리는 각자의 삶, 각자의 자리, 각자의 오늘을 함께 읽고 있었습니다.
딸은 조용히 제 옆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로비에 다른 회원들과 조용히 기다려주었습니다.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딸에게 남았으면 하는 건 단 하나였습니다.
“어른들이 책을 통해 이야기 나누는 풍경”
“의견이 달라도 존중하며 듣는 시간”
이건 설명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앉아 있지 않아도 밖으로 전해지는 감각이니까요.
제가 조금 늦게 도착했을 때,
아무도 서두르거나 눈치를 주지 않았습니다.
“괜찮아요, 오신 게 어디예요.”
그 한마디가 참 좋았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결국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요즘은 혼자 읽는 독서도 많습니다.
유튜브 요약으로 대신 읽는 시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전히,
책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대체되지 않습니다.
책은 말수가 적지만,
사람은 그 옆에서 스스로 말을 시작합니다.
어제의 독서모임은
‘세계사를 공부한 시간’이기보다,
딸과 함께 참여했지만 독서 모임에는 함께 앉아 있지 못한 아침, 집안일과 일상을 품은 채 도착한 자리, 책을 핑계로 서로의 생각을 건네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겹쳐진 좋은 하루였습니다.
이런 하루가 쌓이면,
책도 사람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조금씩 더 단단해질 거라 믿습니다.
책은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함께 말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 진주여성민우회에서,
딸과 함께한 한 아침의 기록
이 책을 마치고는 "총 균 솨"라는 제목의 책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