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피켜스 (2016」, 「그린 북 (2018)」
시어도어 멜피 감독 / 터라지 P. 헨슨, 옥타비아 스펜서, 자넬 모네 주연
그냥 그러려니 해. 여기 일이 그런 거야.
1960년대 초반. 한창 미국과 소련이 우주 기술 전쟁을 벌이던 와중, 주인공인 세 여성은 무려 엘리트 학자들만이 모인 NASA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직 만연했던 시대. 그녀들은 모두 남다른 천재성, 용기, 성실함, 강인함 등을 가졌으나 시대적인 부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정규 전산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차별받는 이유에 대해 정확히 짚어낼 수도, 심지어 말할 지위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어쩌면 그건 차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조차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천재적 수학실력의 캐서린과 엔지니어링에 재능이 있는 당돌한 메리, 관리자로서의 리더십과 끈기를 가진 도로시가 시대에 스며든 문제없는 답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피터 패럴리 감독 /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 주연
폭력으로는 절대 이기지 못합니다. 품위가, 언제나 승리하죠.
브롱스의 입담꾼, 말로 안되면 주먹부터 나가는 동네 해결사 떠버리 토니. 토니 발렐롱가.
마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이자 당시에는 별게 아닌 인종차별주의자기도 했던 그는 생활고에 못 이겨 흑인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외로운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던 돈 셜리의 로드매니저. 터프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좋은' 고용인을 찾던 돈 셜리는 북부에 비해서 훨씬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투어에 토니를 데려간다.
그러나 토니는 융통성 없이 고상한 척만 하는 돈을 못 마땅해했고, 돈은 흑인인 자신을 앞에 두고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드러내며 품격 없이 구는 토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여정은 출발부터 삐걱댔으나, 장장 2달간의 동행을 겪으며 두 사람은 함께 변해간다. 색깔 따위 없는 서로의 외로움과 고통을.
두 작품은 모두 1960년대 초반 북부에 비해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지역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히든 피겨스」는 인물들의 억양이나 차별법이 대놓고 시행되고 있는 버지니아 주(남부)가 배경이고, 「그린 북」에서 피아니스트인 돈 셜리는 북부에서의 더 큰 성공가도를 뒤로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남부 지역으로 투어를 떠나죠.
서양사에 있어서 1960년대는 저항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6.25 전쟁 이후의 한국처럼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경제 성장과 사회 체계 재건을 통해 이유 없이 차별받던 소수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권위적이던 미국 사회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반발심이 극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실제로 1960년대를 거치며 미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가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크게는 조직의 작게는 개인의 변화를 가져온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이토록 설정된 것도 당연히 우연은 아니죠.
「히든 피겨스」에선 "그냥 그러려니 해."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사실 서로의 사회를 겨냥한 말이기도 한데요.
권위를 내려놓지 않던 미국 사회는 차별받던 소수 커뮤니티들에게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들이밀며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말하고, 반대에서는 그냥 우리를 그러려니 볼 수는 없는 거냐'라고 묻습니다.
성적 지향성도, 전과 여부도, 소득 수준도 아닌 피부 색깔과 성별 때문이라니!
당시 흑인들을 포함한 유색인종들은 버스의 뒷자리에만 앉거나 도서관, 화장실 심지어 식수대와 커피 포트까지 따로 써야 했고, 여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진학, 승진조차 불가능한 상황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린 북」에서도 어딜 가나 비방과 폭력은 일상이고, 수트를 살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함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옷을 입어보는 것조차 거부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그린 북」의 제목대로 이 같은 현실을 고증하는 요소가 바로 "그린 북"입니다. 그린 북이란 유색인종이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유색인종도 사용 가능한 시설들(숙박, 식당 등)을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토니가 로드매니저로서 돈과의 남부 투어를 시작할 때 받았으며 실제로도 존재했던 책이었고, 당연하게도 유색인종 시설들은 대부분 매우 낙후되어 있었죠.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백인이었던 토니조차 이 책의 존재를 몰랐고, 소개되는 시설들의 열악함을 보며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초법적인 이유로 집단 속 개인의 의식주를 정해준다는 것은 오늘날에서 생각했을 때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기도 합니다.
두 작품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장면이자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구간이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울부짖으며 품위 속에 감춰주던 근원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당신은 흑인 같지도 않다."라는 토니의 말에 분개한 돈이 일갈합니다.
그래요! 토니, 난 성에서 살고 있죠. 혼자서!
그리고 돈 많은 백인들이 나한테 피아노 두들기라고 돈을 줍니다.
자기들이 좀 문화적이라고 느끼고 싶어서요!
하지만 내가 무대에서 내려가는 순간,
나는 그들에게 똑같은 검둥이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흑인답지도 않고,
백인답지도 않고,
남자답지도 않다면,
난 뭔가요!
돈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뿌리를 경험할 기회가 많이 없었습니다. 돈 셜리라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치는 검둥이"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 하는 백인들 사이에서 자랐죠.
돈 많고 똑똑한 양반들 사이에서 부비다 보니 품위와 매너, 지적인 말투를 갖추었으나 그가 관객들에게도 독특한 캐릭터로 다가오는 만큼 돈은 백인에게도, 흑인에게도 돌연변이 같은 취급을 받을 뿐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돈은 카네기 홀의 꼭대기에서 영주처럼 살지만, 외롭죠. 투어가 일상이다 보니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어렵고, 게다가 그는 당시 불법이었던 동성애자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보통 소속감을 표현하며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화목한 가정이나 엘리트 스쿨, 그것도 아니라면 남성 또는 한국인을 소개란에 적어 넣듯이.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어두운 족적을 밝히지 않습니다. 가정폭력 피해자, 전과자는 친한 사이에서도 쉽게 말하지 않죠. 돈은 자신을 표현하는 모든 것에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입니다. 누구도 명료하게 그 인과를 설명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결국 피아니스트와 흑인,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나가는 개인이자 돈 셜리라는 네이밍이 한 데 어우러지는 장면은 바로 크리스마스 공연을 거부하고 유색인종 전용 식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재즈를 즐기는 부분입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에 돌아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피부색을 떠나서 모두가 같은 장소에 모인 인간일 뿐이라고요. 백인은 모두 악인이고 적이라며 역시 편견을 갖고 있던 돈에게 변화가 왔음을 암시하는 부분이자,
돈을 신기하게 볼 뿐이 아니라 서로의 미소를 보며 흥겹게 춤을 추는 현장입니다. 아무도 돈의 이질적인 모습을 응시하는 사람이 없지만, 영화 내에서 가장 돈의 모습이 짙어지는.
와중에도 피아노 위의 브랜디를 내려놓으며 피아니스트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는 그의 일관된 품위까지.
「히든 피겨스」 속 캐서린의 외침
역시 「히든 피겨스」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나의 혼란'이 아니라 '당신들이 외면하는 모순'을 꼬집고 있죠.
수학 천재이자 계산원으로 NASA의 중요한 프로젝트에 배치받았던 캐서린 고블. 그녀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두를 압도하는 실력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별과 무시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중 자신이 새로 배치받아 근무하는 건물에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어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마다 800미터를 전력질주하는 모습.
그리고 하얀 셔츠를 입은 이들에게서 벗어나 형형색색깔의 차들이 널린 거리를 쏘다니는 모습은 그녀의 삶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루에도 여러 번 40분씩 자리를 비우는 캐서린에게 프로젝트 책임자인 알이 다그치자 그녀는 모든 분노를 터뜨립니다.
화장실이요.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이 건물 전체에는 화장실이 없단 말입니다.
제가 갈 수 있는 유색인종 화장실이요! 알고 있으셨어요?
생각해 보세요, 해리슨 씨. 제 복장이요.
무릎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제 치마, 제 하이힐,
그리고 심플한 진주 목걸이.. 글쎄요. 전 진주 목걸이가 없는데요!
유색인종에게 진주 목걸이를 살 만큼 돈을 주긴 한답니까?
그리고 하루종일 개처럼 일하죠!
당신들 누구도 만지기도 싫어하는 커피 포트를 쓰면서!
그러니까, 실례지만 하루에 화장실 몇 번은 가야겠어요.
철저한 능력주의를 지향하는 인물로 일만 잘한다면 인간이든 침팬지든 상관하지 않던 해리슨에게도, 캐서린의 울분은 초점이 안 맞는 안경을 쓰던 것처럼 시야에 있어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일깨웠습니다. 뭔가를 깨달은 그는 다음 날 '유색인종 화장실'이라는 간판을 부수며 말하죠.
이제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은 없다. 백인 전용도 없지. 쓰고 싶은 곳 쓰라고. 책상에서 가까우면 더 좋고.. 나사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색깔의 오줌을 싼다.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던 「그린 북」의 물음과 조금은 핀트가 다릅니다. 관객에게는 "나는 누구였을까"에 대해 질문을 던지죠.
내가 저런 거대한 부조리 앞에 놓였다면, 누구처럼 행동했을까? 해리슨처럼 했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고, 그 공간에 있던 다른 팀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고백할 수도 있죠. 어쩌면 캐서린처럼 거대한 불합리에 놓인 사람일 수도 있고요.
「그린 북」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의 대사지만 두 작품 모두의 해결의 근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품위'죠.
여기서 말하는 품위란 턱시도를 입고, 와인잔을 기울이며 어려운 단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본다는 존엄성에 있습니다.
상처받는 이들이 느꼈던 폭력은 폭력으로 되갚을 수 있을지언정 되돌릴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흑인인 돈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이 와도 담담하게 그리고 품위 있게 대응하는데요.
경찰에게 욕을 하고 자신의 처지를 마냥 비관하는 것이 아닌 전화 한 통의 권리를 주장해 부통령과 통화를 하여 억울하게 유치장에 갇혔던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이 크리스마스 공연의 메인인데도 백인들과 같은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하자 계약과 보수를 포기하고 자신도 그들을 위해 공연을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3인방도 단순히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우울에 빠지거나 과격한 방식을 통해 투쟁하지 않습니다.
캐서린 고블은 꾸준히 결과로 증명해 내며 능력을 인정받아 우주선 발사를 성공시키고,
메리 잭슨은 NASA 최초 흑인 여성 엔지니어이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정당한 절차와 의견을 통해 쟁취하죠
도로시 본은 끈기 있게 IBM을 공부하고 팀원들을 이끌며 유색인종 주임으로써 인정받습니다.
생김새, 출신지, 가정사, 문화는 달라도 인간이라면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가치로 높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성실함, 용기 따위의 가치를 묵묵히 증명해 냅니다.
물론 누군가는 태어나서 그런 걸 적극적으로 증명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 불합리하고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을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듯이 이를 이겨낸 사람들 역시 세상이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하는 게 당연하겠죠.
자신의 분노를 고통으로 갚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단단하게 지킨 그들은 누구였고, 우리는 누구로 살아갈 것인가.
품위 있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