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이프」, 2013
한 번쯤은 연인에게 "아, 걔는 그냥 친구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또 좀처럼 식지 않는 '그냥 친구'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이 무언가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소유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기에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모두 알다시피 연인은 소유물이 아니기에 수많은 남녀들은 다툽니다.
나도 '쿨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내 연인의 속마음도 모르는 마당에 생판 남인 주변인들의 의중은 덮어두고 모른 척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이 간의 이런 불안감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인간의 사랑이 딱...히?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인데요.
사랑은 시궁창 같은 거야. 자기 똥을 먹는 것처럼.
조금 지저분하지만 꼭 틀린 말인가요? 이는 오늘 소개할 작품에 등장하는 대사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 대사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어찌 보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준 상처에 대한 변명 같기도, 흉터로 얼룩진 과거를 달래는 위로 같기도 합니다.
사랑에 상처받는 우리지만 다시 그것에게로 돌아가 심장을 내놓는 우리. 그럼에도 사랑은 분명 내 시궁창을 색다르게 바꿔주지 않나요.
시작하기 전 업로드가 늦어진 부분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현생이 너무 바빠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
현재 업로드 범주를 넓혀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계정을 동시에 운영 중인데,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브런치 업로드 글들을 잡지식으로 편집하거나 짧은 동영상도 업로드 중이니, 시간 괜찮으시다면 한번 둘러보고 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마이클 도즈의 달콤 씁쓸한 로맨스 영화 「왓 이프」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희대의 난제. "남녀 사이에 친구는 있는가?"라는 주제이자 서구권에서 이야기하는 프렌드존(Friend Zone)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요.
볼 때마다 트리플 A급 작품의 느낌보다는 약간의 싼마이(?)가 느껴지면서도 배우들의 열연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사로 왜인지 정감이 가는 작품입니다. 큰 흥행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아니지만 겨울이 오면 한 번씩은 별생각 없이 보게 되는 작품이에요.
「왓 이프」는 파티에서 우연히 샨트리에게 첫눈에 반한 월레스의 위험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니, 첫눈에 반할 수도 있지. 왜 위험한 사랑이느냐?
예고 없이 만난 인연!
만약, 우리가 사랑이라면…?
시련의 상처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지고지순, 순정남 ‘월레스’
사랑스럽고 유쾌한 성격으로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녀 ‘샨트리’
어느 날 파티에서 ‘샨트리’를 만나 첫눈에 반한 ‘월레스,’
하지만 5년이나 사귄 번듯한 애인이 있었던 샨트리는 그에게 친구로 지낼 것을 제안하고
월레스는 애써 쿨하게 동의한다.
친구로 지내며 모든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추억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향해 커져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는데…
아슬아슬한 썸 타기! 진짜 연애는 시작될 수 있을까?
영화는 쉴 틈 없이 바빠 보이는 도시의 전경을 비춰주며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월레스는 집 지붕 위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누군가의 음성 메시지를 듣고 있는데요.
이렇게 돼버렸지만, 난 자기를 사랑해.
'메간'이라는 이름과 함께 들려오는 한 여자의 목소리. 월레스는 자신을 상대로 바람을 핀 전 여자친구, 메간의 목소리를 듣다 씁쓸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지워버립니다.
어느새 시끌시끌한 홈파티에 와 있는 월레스. 그는 여느 파티에서의 만남이 그러하듯 별 이유 없이 샨트리를 처음 만납니다. 별 대화 없이 다시 찢어지는가 싶었지만, 이후에도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자꾸 마주치게 되는 두 사람. 어쩌면 무의식 중에서 월레스는 샨트리를 눈으로 좇고 있던 게 아닐까요.
어쩌다 보니 샨트리를 집까지 데려다주게 된 월레스는 관계의 진전을 원했는지 그녀의 번호를 받아내기까지 하는데요. 이 정도면 그린라이트인데, 그 순간 청천벽력처럼 떨어진 샨트리의 한 마디입니다.
내 남자친구가 걱정하고 있을 거야.
아주 짧은 순간 많은 감정이 지나가는 것 같은 월레스의 표정. '친구'로 지내보자며 두 사람은 악수하지만, 번호가 적힌 종이를 쥐고 있으면서도 월레스는 오묘한 표정을 합니다.
이내 집으로 돌아온 월레스는 메간의 음성메세지처럼 샨트리의 번호가 적힌 종이를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삑' 하는 소리가 나며 삭제된 메간의 음성메세지와 손에 힘을 빼자 바람에 훨훨 날아가버린 샨트리의 번호. 두 경우 모두 월레스의 손짓 한 번에 끊어진 연들입니다.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다고는 못하는.
「왓 이프」에는 풀스 골드(Fool's Gold)라는 빵이 등장합니다.
우선, 이탈리아 빵 한 덩어리에 버터를 입히고 구워.
그리고 빵 안 쪽을 파내서 땅콩버터 한 통과 잼 한 통을 넣는 거야.
그다음엔, 거기에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을 올리는 거지.
제조법을 알려준 뒤 월레스는 이 무지막지한 샌드위치는 보통 8~10명이서 나눠먹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는 혼자서 다 먹었다고 덧붙이는데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거대하고 어딘가 이상한 빵을 홀로 먹어치운 엘비스는 '괴짜'처럼 보입니다. 그다지 맛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참 별나다.
Fool's Gold는 우리나라말로 황철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철광석이지만, 황금색을 띠고 있어 금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요. 영문명 그대로 ‘바보의 황금’인 셈이죠.
월레스는 친구인 알렌과 샨트리에 대해 대화합니다.
월레스 _난 메간과 같지 않아. 남자친구 있는 사람을 사랑한답시고 두 사람한테 상처를 어떻게 줘?
알렌 _그럼 방법이 정해졌네. 네 마음을 고백하고 사귀든 차이든 하던지, 아니면.
월레스 _아니면?
알렌 _잊어버리던지.
월레스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합니다. 알아낼 수도 없을뿐더러 옳은 것인지조차 헷갈려하죠.
바보가 황금이 뭔지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바보가 사랑이 대체 뭔지, 알아낼 수나 있겠어.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으니, 번호가 적힌 종이를 날려 보낸 뒤 두 사람은 영화관에서 우연히 만납니다. 마침 그녀의 남자친구인 벤은 일 때문에 그녀와 영화를 보러 함께 오지 못한 상황.
두 사람은 그렇게 어두운 저녁을 함께 보내며 하마터면 피어나지도 못했을 대화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계속해서 서로의 많은 것을 공유하며 친구 이상으로 발전해 나가는 두 사람의 관계. 샨트리는 월레스 쪽으로 기우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벤의 장기 외국 출장으로 홀로 남겨진 그녀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월레스를 쳐내지 못합니다. 말없이, 그리고 시들지 않는 모습으로 곁을 지켜주는 월레스.
그는 샨트리에게 있어 마치 선인장을 껴안는 것과 같습니다. 품에 깊게 들어오면 온몸이 따갑고 죄책감이 들 텐데, 이미 껴안은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처럼요.
와중에 월레스는 샨트리에 대한 자신의 진심이 누군가를 상처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놓았던 '사랑'의 온상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데요.
결국 월레스는 진심을 전하기 위해 샨트리가 잠시 머물고 있는 벤의 출장 숙소로 떠납니다. 먼 옛날의 파발처럼 한마디를 입속에 꽁꽁 숨겨두고 길을 나선 것입니다. 뚜껑은 꽉 틀어막았지만, 너무 흔들어대서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마음을 가다듬고.
월레스의 사랑은 황금이었을까요?
사랑. 거의 대부분의 지구인들을 한 번씩은 우울감에 빠지게 한 장본인입니다. 가족과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에 붙는 구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달라붙지 말았어야 할 것들도 있는데요. 배신과 거짓말 그리고 고통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월레스는 외도로 이혼한 부모님과 전 애인 메간의 공통점이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기존의 사랑을 잊게 할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주는 누군가와의 만남과 결국 타인에게 고통과 불신만을 안긴 후회.
결국 그 가운데에는 강렬한 사랑이자 그것을 뒷받침하는 케케묵은 권태가 있겠으나,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고통을 가볍게 만들어주진 않습니다.
샨트리 역시 4년간 이어온 사랑이지만 점차 자신보다 일이 먼저가 되는 벤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되는데요. 그렇다 해도 월레스에게 안길 수는 없는 노릇임을 깨달으며 애써 시선을 회피하곤 합니다.
이토록 복잡하고도 지저분한 사랑, 남녀 문제에 관해 감독은 등장인물인 니콜과 알렌의 대사를 통해 자신만의 정의定義를 말하고 있습니다.
니콜 : 사랑은 더러운 거야. 제대로 시궁창이지.
알렌 : 자기 똥을 먹는 것처럼.
이 대사 직전에 월레스와 알렌이 누군가 자신이 싼 똥을 먹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꽤나 더럽게 직설적이고도 함축적인 메시지입니다. 똥을 먹는다는 것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겠지만 그 모든 해로움을 감수하고 행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 더러워. 아무튼 그렇습니다.
다만 사랑은 더러운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보단,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던 우리의 과거를 위로하는 듯싶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시궁창에 풍선을 달고 꽃잎을 뿌려주기도 하니까요.
바보들은 일단 풀스 골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풀스 골드를 입 속에 집어넣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오물 위를 구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기도 하거니와,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만약'을 붙여가며 힘들어합니다. 만약이란 것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일 테니까요.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느 사람들보단 똑똑하겠지만, 누군가를 바보처럼 사랑해 본 경험 역시 없습니다.
바보였던 사람이 있고 바보인 사람이 있지만, 바보가 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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