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룩 업」, 2021
6개월 뒤, 인류는 소행성 충돌로 멸망합니다.
최소한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소행성의 크기는 지름 10km 내외라고 합니다. 핵폭탄 수백만 개와 맞먹는 충돌, 곧이어 발생하는 자연재해와 공기 중으로 떠오른 먼지 때문에 빙하기가 시작된다고 하는데요.
만약 이런 인류의 뻔한 결말을 여러분만이 알고 있다면 어떨 것 같나요? 여러분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인류는 곧 멸망할 거예요."라고 말해야만 한다면, 어떤 이야기로 시작할 건가요?
애덤 맥케이 감독의 「돈 룩 업」은 우연히 혜성을 발견한 주요 인물들이, 곧 그것이 지구와 충돌해 멸망을 가져올 것임을, 또 그러한 진실을 세상에 알려 인류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이야기입니다.
얼핏 보면 「2012」나 「아마겟돈」처럼 재난형 블록버스터가 생각이 나는데요. 그러나 애덤 맥케이 감독의 특기는 다름 아닌 블랙코미디입니다. 본 작품도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의 인류를 보여주며 신랄하게 풍자하는 블랙코미디 영화인데요.
때문에 본 영화는 포스터에 쓰여있듯 아주 멀 것만 같은 이야기지만, 또 아주 가까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Based on truly possible events...
진짜 '실화'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천문학교수 랜달 민디의 제자인 케이트 디비아스키는 새로운 혜성을 발견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랜달과 케이트는 아름다운 '디비아스키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는데요.
그러나 계산을 이어나가던 도중 두 사람은 충격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약 6개월 뒤 디비아스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죠.
두 사람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크기의 혜성을 두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NASA와 연락합니다. 연락을 받은 NASA의 박사 테디는 두 사람과 함께 현 사태에 대한 보고를 하려 백악관으로 향하는데요.
헌데 분위기가 좀 이상합니다.
3주 뒤에 중간 선거니까, 그전에 말 퍼지면 하원 선거는 질 거고.
그럼 우리도 손을 못 써요. 그러니 좀 관찰하며 기다려봅시다.
이 말고도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대통령은 그들의 학력을 비웃거나 장난스레 넘기는 등 상황은 답답하게 흘러가죠. 언론에 출연해 호소해 봤자 그들은 '밈'이 되어 인터넷을 허우적댈 뿐이었습니다.
인기 프로그램인 '데일리 립'에서조차 자신들의 경고가 흐지부지 넘어가자, 케이트는 거의 울먹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진짜 절망적이고,
공포스러워해야 할 일이에요.
쳐 웃고 넘길 일이 아니라고요.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빌어먹을 혜성 때문에 다 뒈진다니까요!
여전히 팔아먹기 위한 광고와 끌어들이기 위한 유세는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 지구를 닮은 듯 혜성 역시 우직하게 가까워져만 가는데요. 점에서 손바닥으로, 또 머리 위로.
당연하겠지만 다짜고짜 세상에 종말이 올 것임을 알리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거든요. 당장 번화가만 나가더라도 각자 자신만의 확고한 진리를 설파하는 이들은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아직 충돌하지도 않은 혜성을 설득하는 것.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설득하는 일과도 같은데요. 작품이 풍자하고자 하는 지점은 이 부분에서 시작합니다.
인류는 보이지 않는 공백을 어떻게 채워놓는가.
자신의 지지율이 폭락하자 반전을 꾀하기 위해 그제야 움직이는 대통령, '인류 멸망'을 멋대로 주물러 '인류 마지막 세일!'처럼 팔아먹으려는 언론과 기업 등 보이지 않는 공백을 두고 화합을 위한 논리가 아닌 자신의 사익을 위한 변명으로 채우곤 합니다.
또 작품 전반적으로 팽배한 반지성주의나 흑백논리, 양비론의 오류나 거짓선동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온 세상이 농담을 꿰어 만든 진주목걸이처럼 보이기도 하죠.
어찌어찌 우주비행사와 거대한 우주선, 펄럭이는 국기와 가슴에 가득 찬 애국심을 안고 혜성의 궤도를 변경하는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되지만, 어째서인지 작품은 이제 중반부에 접어들었는데요. 뭐죠? 후반부는 목성에 고립된 비행사가 당근을 재배하는 이야기일까요?
아니죠. 이익에 눈이 멀었던 기업가인 피터 이셔웰을 선두로 급기야 정부는 계획을 변경하게 됩니다.
혜성에 매장된 막대한 자원 채취를 이유로 혜성을 잘게 쪼개어 지구로 착륙시키겠다는 정신 나간 판단을 하면서요.
영화의 가장 클라이맥스 시퀀스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디아블로(Diablo)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디아블로는 유명 게임에서 나오는 것처럼 '악마'의 또 다른 이름인데요. 사실 디아블로의 어원이 되는 동사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그만큼 악마들은 인간의 사이사이에 숨어 이간질하고 갈라지게 하는 듯도 하죠.
작품 중반부, 랜달은 어느새 자신에게 몰린 시선과 인기에 눈이 멀어 정부를 위한 얼굴마담이 되어있었는데요. 그러나 과학자로서 혜성에서 자원채취를 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부의 계략을 폭로하기 시작합니다.
과학자로서의 사명을 다시 되찾아 케이트, 테디와 함께 정부의 거짓에 속지 말 것을 외칩니다. 제목과 반대로 "Look Up! (하늘을 올려다봐)" 운동을 펼치면서요.
하늘 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혜성을 제발 좀 보라는 뜻입니다. 정부의 계획은 과학자들의 피드백을 검토하지 않은, 지극히 사업가적인 관점으로 접근한 허무맹랑한 계획이며, 배부른 자들을 배 찢어지게 하기 위해 선량한 국민들의 목숨을 인질로 삼고 있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당연히 주인공 3인방의 운동에 대항하는 "Don't Look Up!" 진영도 있겠죠. 혜성의 존재가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는 정부를 믿거나, 혜성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작품은 같은 인간들 사이의 첨예한 의견차와 가까워질 수 없는 적대감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공백을 채워 넣고자 발버둥 치는 우리를 풍자합니다.
여느 때와 달리 악마가 등장한 만큼 인간세상은 잘 흘러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강행한 이셔웰과 정부의 무모한 계획은 당연하게도 실패해 버렸고, 본 영화는 혜성 충돌을 다뤘음에도 혜성이 진짜 충돌해 버리는 충격적인 엔딩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 '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차이를 두는데요. 랜달은 정부를 자신들의 계획이 무산된 이후, 인기에 찌들어 불륜으로 배신했던 아내에게 돌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케이트 역시 자신을 이해해 주는 남자인 율과 사랑에 빠졌고, 결국 마지막 만찬이 된 저녁식사에 주요 인물이 모이게 됩니다.
점점 혜성의 영향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공포에 떨지만 애써 일상적인 얘기로 진정시키려 하는 인물들. 영화의 베스트 씬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충돌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오자 랜들은 모든 게 끝날 때가 돼서야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데요. 거대한 농담 같은 영화의 펀치라인을 담당하는, 담담하지만 뼈아픈 고백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린 부족한 게 없었어.
그렇지?
「돈 룩 업」은 웃긴 영화입니다. 심오한 사회비판적 개그 말고도 피식, 웃게 하는 농담들이 즐비한데요. 미국의 트렌드나 역사, 밈을 잘 알고 있다면 그 재미가 배로 증가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유명인을 모티브로 하기도 하고,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결국 혜성은 지구에 충돌하고 관객들과 함께하던 인물은 모두 사망했겠지만, 나름의 사이다스러운 쿠키영상과 그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는 우주를 떠돌겠지요.
생각해 보면, 우린 정말 부족한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내일 당장 화산이 터져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 해도, 부족함 없는 삶을 돌아보기에 공백조차 없었던 세상. 올려다보는 것보단 돌아보는 게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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