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당신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추억하나요? 지금보다 정이 많았고 더 상식적이었던 때라고 돌이키곤 하나요?
'쫓을 추'와 '생각할 억'으로 이루어진 말, 추억(追憶). 또 그런 추억을 가능케하는 과거의 기록인 기(記)억.
차이점이라면 기억은 그 시절을 지금으로 가져오는 것이고, 추억은 그때의 나를 쫓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은데요. 또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과거의 기억들은 곧 '나'라는 개인에 의해 추억되며 '그 시절'이라는 이름의 시대로 재탄생되곤 합니다.
다만 언제나 과거 미화를 일삼는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시대 속 끔찍했던 일들을 묻어두곤 합니다. 기억으로 집약된 아픔을 추억으로 마모시키며 '그땐 그랬지'라는 말로 마무리하면서요.
살인의 추억「살인의 추억」, 2003
・ 봉준호 감독 /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외
봉준호 감독의 작품 '살인의 추억'은 실제로 오랫동안 미제사건이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스릴러 형사물입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기를 이끈 명작 중 하나이자 작품 자체의 장르적인 재미로만 보아도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치는 재미를 선사함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인데요.
허나 군부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또 형사들의 수사를 방해하는 요소 중 당시 시대상도 포함되는 만큼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그 시절'을 좋게 좋게 추억하고 마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흉악범을 길러낸 시대를 기억하라
- 박평식 평론가 -
높은 빌딩과 재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대신 넓게 드리운 논밭과 굉음을 내는 경운기. 그땐 그랬듯 벌어지는 학생 시위와 최루탄 연기 속 새어 나오는 비명과 고함들.
어찌어찌 조용하던 시골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에는 성격은 딴판이지만 수명을 팔아서라도 범인을 잡고 싶은 두 형사가 뛰어듭니다.
I
두 형사
작품의 줄거리는 앞서 설명했듯 두 형사가 지역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입니다. '범인 잡는 눈깔'을 가졌다며 모든 것을 직감으로, 또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려는 박두만(송강호 扮)과
서울 출신 형사로 박두만보다는 지능적인 수사를, 또 그의 대사처럼 직감보다는 서류를 신뢰하는 형사인 서태윤(김상경 扮)이 주요 인물이죠.
수사 방식에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두 사람은 작품 중반부까지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용의자를 잡아다가 고문하고 강압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박두만과 조용구의 모습은 영락없는 구시대적 인물임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한국은 땅덩어리가 작아서, 발로 몇 번 뛰다 보면 다 밟히게 되어 있거든!
너처럼 잔머리 굴리는 놈은 미국이나 가!
반면 서울 깍쟁이 형사였던 서태윤은 지역 형사들의 수사 방식을 처음부터 혐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극에 달하는 스트레스, 또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현규(박해일 扮)의 등장으로 태윤의 태도 역시 변하게 되는데요.
특히 자신이 챙겨주었던 동네 소녀가 살해되자 누구라도 벌해주고 싶은 마음에 '박현규가 범인이어야만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기에 이르죠.
반대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가는 박두만은 점점 차가워지는 머리로 사건을 대하려고 합니다. 마구잡이로 정해두었던 용의자 노트를 찢는가하면 박현규를 폭행하는 서태윤을 뜯어말리는 등 결국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성향이 서로 반대가 되어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작품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최후반부에서 '박현규를 범인으로 볼 수 없다'는 DNA 검사지를 확인하곤 그토록 서류를 맹신하던 서태윤은 절망한 나머지 자신이 혐오하던 방식대로 박현규에게 '네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라'며 다그치며 협박하죠.
두만 역시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의 직감을 사용해 보지만 박현규의 눈을 또렷하게 응시해도 그 속에서 보이는 건 허망한 자신의 모습뿐. 결국 범인을 잡는 데 실패한 두 형사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때'라는 텅 빈 무대에서 서성일뿐입니다.
모르겠다, X발.. 밥은 먹고 다니냐?
II
시대의 살인
・ 숨겨진 메시지
끔찍한 범죄이자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인 살인을 추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고서야 말이죠. 어딘가 역설적인 이 말은 작품의 제목으로서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를 표방합니다.
그 시절을 당신은 어떻게 '추억'하는가?
사실 작품을 잘 살펴보면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감독의 노골적인 시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군홧발로 시위대를 짓밟던 조용구의 모습과 시대의 폐쇄성을 나타내는 등화관제.
또 결국 군화를 신던 발을 파상풍으로 인해 절단하고 마는 조용구 형사와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의 범행을 돕는 게 되어버린 등화관제와 경찰 중대원들의 시위대 진압.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현규의 수상한 점들이 사실 운동권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꽤나 말이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누구냐 넌 결국 무고한 여성들을 살해한 범인은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시대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버립니다. 그저 그런 무시무시한 사건이 있었던 때로요.
이러한 아이러니와 작품의 메시지, 서사가 완벽하게 삼박자를 이루는 장면이 바로 마지막 장면인데요.
범인 검거에 실패한 뒤 형사를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다 가정까지 이룬 박두만은 시간이 흘러 다시 사건 현장을 찾습니다. 끓는 피로 밤낮을 뛰어다니던 형사 시절을 추억하기도, 또 해결하지 못하고 떠난 과제를 씁쓸해하는 듯도 싶죠.
첫 피해자 시신이 발견되었던 도랑 밑을 보던 그는 동네 소녀에게서 '얼마 전에 어떤 아저씨도 여길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두만은 잠시 형사로 돌아간 듯 소녀에게 '그 아저씨 얼굴 어떻게 생겼느냐'라고 묻는데요.
그냥.. 평범해요.
그냥, 평범해요 자신에겐 '그냥 특이한 아저씨'였던 남자를 기억하는 소녀와
'그 시절'을 추억하는 두만.
진정 '그 시절'을 곧이곧대로 추억한다면, 우리의 표정은 이래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배우는 절대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불문율과 다르게 이례적으로 카메라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두만의 마지막 모습은 자타공인 한국영화 최고의 장면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까지도 미제 사건이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이 영화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만들어진 씬이라고 하는데요.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실제 사건의 범인은 오늘날 드러났지만, '살인의 추억'이 남겨둔 것은 그것만이 아니기에 더욱 명작으로 거론되는 듯합니다.
필자는 보통 한국 영화를 추천해 달라 할 때 꼭 언급하는 영화입니다. 꼭 다각적인 해석과 깊은 탐구 없이도 장르 영화 자체로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기 때문인데요.
두 형사의 감정선 변화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당시의 모습, 또 조금씩 수사망을 좁혀나가는 희열이 엄청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