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이 '사회적 약자의 범행을 정당화한다'는 지적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작품 자체가 하나의 큰 농담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모든 이야기는 그저 '갈 곳 없어' 수용소에 있던 아서가 떠든 망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아서
육체라는 껍데기 속 분노와 웃음뿐인 자신을 파악하려는 조사관과 관객 모두에게, '넌 이해 못 할 거야'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치는 아서의 모습은 영락없는 조커입니다.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꾸밀지언정 세상을 풍자하고 비웃으려는 인물이죠.
어차피 진상을 이해 못 하는 우리는 그의 불쾌한 농담을 들으며 누구는 그저 불쾌해하고, 누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뿐입니다.
그러나 「조커: 폴리 아 되」는 전편의 매력이었던 모호함의 대부분을 확정시키고 시작합니다. 조커의 범행은 모두 사실이었고, 그는 수용소에 수감된 채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을요.
우연히 수용소에서 '리 퀸젤'이라는 여자를 만난 아서는 그녀와의 동질감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며 다시 삶의 활력을 찾게 됩니다.
철창에서 피어난 사랑
한창 심신 미약을 이유로 재판을 준비 중이던 아서는 급기야 '조커'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리의 구슬림에 넘어가 완전히 조커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재판 도중 상대 검사와 판사를 살해하는 망상을 기점으로 아서는 리의 꼭두각시가 된 것이나 다름없어지는데요.
오로지 사랑하는 리를 위해, 또 두 사람만이 끝낼 수 있는 망상 속 무대를 위해 아서는 사형을 불사하고 조커를 연기하기 시작합니다. 아서가 아닌 조커를 원했던 리와 분노가 아닌 이해를 원했던 아서. 두 사람의 세레나데는 호기롭게 시작하지만 풍선처럼 꺼져가는 환상 속으로 엇나간 채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퀸과 조커
가장 큰 아쉬움은 작품성의 하락입니다.
줄거리 자체가 조커의 형량을 결정하는 법정싸움, 그리고 사랑을 담고 있는 만큼 조커라는 것 자체에 대한 고찰이 들어갑니다. 문제는 전작에서 잘 끝내놓은 요소들을 다시 꺼내와 설명을 주저리주저리 한다는 점인데요. 이는 전작에서 쌓아온 조커의 서사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이웃집 여성이었던 소피의 운명, 조커를 추앙하는 사람들의 군중심리, 아서가 조커를 원했는가 등 작품의 최종적인 주제의식인 '조커'라는 사회 현상 자체이자 공유정신병의 본질을 납득시키기 위해 정보를 급하게 풀어냅니다.
또 역설적으로 정보량은 많은데, 머리싸움이 동반되어야 할 법정물로서의 재미는 반감이 됩니다.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든 말든 아서는 망상병 환자니까요. 재판 도중 흔들리는 아서의 당위나 마지막 재판에서 갑자기 자기반성을 해버리는 아서의 동기와 핍진성은 설득이 너무나도 부족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냥 아서가 호구 잡힌 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이러한 매력적인 캐릭터의 추락에 대한 아쉬움 자체를 의도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예고편부터 마케팅까지 조커의 화려한 복귀를 연출해 놓고는 관객의 배신감마저 작품의 메시지로 치부하려는 시도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상업영화일뿐더러, 기만이잖아요?
툭툭 맥을 끊는 뮤지컬 장면 역시 집중력 방해에 한몫을 합니다. 단순히 전작이 진중한 분위기였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넘버의 구성과 빈도, 뮤직비디오스러운 세트장이 꽤나 흐름을 깨는데요.
'집중력 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작보다 훨씬 무거워진 주제, 주요 인물의 추가 등장과 엔딩을 생각하면 뮤지컬이라는 요소로 인해 오히려 더 깊은 몰입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종합적으로 조커라는 서사의 붕괴, 메꾸지 못한 전작과의 괴리, 뮤지컬의 필요성, 작품성보단 의도로 인정받으려는 모습 등 허무함 말고는 남긴 게 없었습니다. 전작의 계단씬처럼 머리에 남는 시퀀스도 딱히 없고, 레이디 가가 버전의 'That's Life'만 조용히 감상하다 영화관을 나오게 된, 아쉬움이 크게 남는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