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2019
사각예술은 각종 영화, 만화, 음악 등을 리뷰하고 해석하며 덧붙이는 매거진입니다. 업로드 주기는 비정기적이며 현재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운영 중에 있습니다 :)
모든 작품은 스포일러를 동반할 수 있으며 들러주신 노고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왈가왈부가 필요 없는,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입니다. 코믹스 원작이라는 양날의 검을 갖고 있음에도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챙겨, 몇 년간 물장구만 치던 DC 코믹스 영화들에게 큰 풀을 선사한 명작입니다.
캐릭터의 전사와 감정선을 완전히 재창조해 코믹스 팬들에조차 납득시킨 각본과 연출. 그리고 히스 레저의 조커와는 다른 방향으로 끝판왕을 찍은 호아킨의 연기까지.
게다가 필자는 이 작품에 크나큰 사회적 틀을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면 후술 할 조커의 정체성은 공감, 이해와 관심이 요구되는 대단한 비극이 아니라 형편없는 코미디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개 같은 코미디였어.
살다 보면 때때로 불쾌한 농담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참고 넘겨도 본전인 상황. 친구의 가정사를 가지고 동의 없이 농담의 소재로 쓴다거나, 누군가의 밝히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를 꺼내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요.
분위기 환기를 위한 심심한 유머가 아니라, 웃음과 관심을 노린 이기적인 장난은 언제나 그 공간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들곤 합니다. 실소를 흘리던 사람들도 웃고 넘겨야만 하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니까요.
아서 플렉은 고담 시 속 평범하게 불행한 소시민입니다. 정신병과 왜소한 몸. 병든 홀어머니와 가난. 참 처절한 삶이지만 쥐가 들끓고 축축한 우울감이 가득한 도시에선 그마저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데요.
사람들은 나나 당신 같은 사람 X도 신경 안 써요.
자신의 인생에 걸친 악조건들에도 아서는 아픈 어머니를 홀로 간병하고, 코미디언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며 자신의 삶을 힘겹게나마 꾸려나가려고 합니다. 모든 걸 이겨내고 내게도 평화가 올 거라고.
그러나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무관심입니다. 누명을 써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별 이유 없이 배에 주먹이 꽂히는 와중에도 세상은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더 많은 확성기를 가져다 대니까요.
관심과 웃음을 갈구한다는 점. 그럼에도 그를 마주한 타인들은 그저 웃고 넘기거나 자리를 뜬다는 점에서 아서의 발버둥은 참 불쾌합니다. 급기야 작품이 진행되며 출생의 비밀, 어머니의 비밀과 세상의 부조리함까지 깨닫게 된 아서는 스스로를 자조하며 희대의 명대사를 치는데요.
여태껏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사실 개 같은 코미디였어.
비극은 타인의 관심과 공감을 받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측은함에서부터 단순히 자극적이라는 이유만으로요.
아서는 자신의 삶이 비극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으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웃음을 갈구하는 '광대'로 살아야 했던 점과 부합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그러나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된 아서는 자신의 고통을 재미없는 농담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세상의 부조리를 품에 안으며 조커로 다시 태어납니다.
"재밌지?"라고 반응을 기다리며 재롱떠는 광대가 아니라, "농담인데 뭐 그리 심각하게 굴어"라고 말하면서요.
후반부 머레이 쇼에서 조커로 등장한 아서는 말합니다.
잘난 당신들은 항상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려고 해.
뭐가 재밌고 재미없는 농담인지 정해놓는 것처럼!
우리는 왜 남들이 슬퍼하는 무언가에 대고 실실 웃으면 안 되는 걸까요? 자신의 의지대로 제어되지 않는 웃음을 내가 왜 참아야 하나요.
이러한 부조리는 아서의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이란 은유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조커로 변신한 이후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이 웃기다고 생각하면 웃는 모습. 초반과 크게 대비되는 포인트라고 볼 수 있는데요.
작품에 대해 일각에선 영화의 주제의식이 마치 사회적으로 불행한 이들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애초에 아서 플렉을 마냥 선한 인물로 그려내지도 않고, 조커로 변한 그를 타락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작품 전체를 진실이 의미 없는, 모호한 농담으로 관통해 내는 감독의 시선과 작품의 서사가 그러한데요.
마지막 아캄 정신병동 수용소에서 조사관과 대화하던 장면으로 돌아가봅시다.
조커가 머레이를 살해한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잘 모르는 시점입니다. 아서의 얼굴에는 분장도 없고, 염색된 초록색 머리도 검게 변했는데요. 조사관과의 대화에서도 이 엔딩 장면의 사내는 아서인지 조커인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작품 중반부 병원 직원과 나눈 대화에서는,
몇몇은 그런 사람도 있고, 그냥 미친 사람도 있고.
- 아캄 정신병동의 수용자는 모두 범죄자냐는 아서의 질문에
다시 엔딩 장면으로 돌아와서, 어쩌면 앞에 나왔던 모든 서사는 마지막 장면의 아서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인 페니 플렉처럼 자신이 벌인 기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망상일 수도 있고요.
관객은 알 수 없습니다. 작 중 아서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그게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완벽한 끝맺음으로 작품은 다시 한번 「조커」의 정체성과 세간의 우려에 대해 미리 대답하는 셈인데요. 결국 한 정신병자의 생각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불행이 진짜였건 아니건 실없는 농담을 던지듯이.
아서는 단지 한참을 웃다 뭐가 웃기냐는 조사관의 질문에 농담이 생각났다고 말하곤, 한 번 들려달라는 말에 대답합니다. 내 개 같은 코미디를,
이해 못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