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2025) — 리뷰 & 해석
Music | 2025.10.14 Editor 사각예술
한 가정이 있다. 높디높은 한강뷰 아파트는 아니지만 마당 딸린 2층집과 따스한 온실이 있는, 5살 배기 아이보다 크지만 여전히 천진난만한 강아지 두 마리, 그리고 나른한 오후를 즐기며 바비큐를 준비하는 네 가족이 그곳에 있다.
정겨운 태양빛이 모든 것을 내리쬐다 집안의 가장의 머릿속에 한 줄기 안도감을 불어넣는다. 가장, 유만수는 모두를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한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아? '다 이뤘다…….'
하지만 만수의 소중한 순간을 담은 디오라마는 조금씩 무너져간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사해 반평생을 바친 제지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되고 만다.
석 달 안에 해낼 거라던 재취업은 벌써 삼 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 부채는 늘어가지만 쓸 손은 없는 바쁜 잡일들을 전전한다. 아내는 취미를 그만두었고 자식들의 꿈은 작고 좁아져간다. 내 것이 되리라 했던 집은 다시 시장에 내놓게 생겼다.
가족의 고통은 마치 가장 비싼 희귀품인 듯 세상이 앞을 다투어 뺏어가지만, 이력서 속 만수의 채용 우선순위는 뒤로만 밀려난다. 만수는 이제 어쩔 수가 없다. 가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가장은 쓰레기일 뿐이다. 만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채용되어야만 한다. 다른 경쟁자를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헤어질 결심] 이후 박찬욱 감독의 장편 복귀작인 [어쩔수가없다]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소설체로 재구성해보았습니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인 '액스 (The Axe)'를 각색해 영화화한 [어쩔수가없다]는 자본주의 사회 아래 부품으로 전락하는 개인, 방향성을 잃은 남성성과 가장의 의의, '어쩔 수가 없다'라는 무심하고 무력한 변명으로 굴러가는 팍팍한 현실 등을 풍자하는데요.
[어쩔수가없다]는 자신 이외의 채용 후보자들을 직접 제거해 재취업을 해낸다는 다소 충격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미장센과 우의적인 연출이 가득한 박찬욱 감독의 성향 상 은유하고자 하는 메타포가 많아 제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여보고 싶어 이번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영화를 꼭 먼저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재생과 대체
네가 쓰는 그 돈도 내가 만든 종이고, 네가 피우는 담배 필터도 종이야.
- 구범모 (이성민)
개나 소나 되는 거면 나도 올해의 펄프맨*이었겠지.
- 최선출 (박희순)
*영화 상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상, 아마도 제지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인 사원들에게 주는 듯하며 작 중 만수는 공정 양품률을 98%가량 달성하면서 '올해의 펄프맨'을 수상한 바 있음
만수의 직업은 펄프맨이었습니다. 영수증, 포장지, 담배 필터, 지폐 등 특수지를 생산하는 제지공장에서 나름의 좋은 성과를 달성했지만 그는 인원 감축으로 인한 정리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이, 해고를 액스(도끼질)라고 하잖아요. 한국에서는 '모가지'.
그니까 이 해고라는 것은 사람의 모가지를 도끼로 찍는 거나 마찬가지다, 뭐 이 말입니다.
- 유만수
만수는 무차별 정리해고에 맞서 외국인인 공장장 앞에서 할 연설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공장장은 바쁨인지 회피인지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요.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드는 그들이었고 또 동시에 잘려나가는 존재인 사람들. 연설을 준비하던 만수와 동료들 뒤로 켜켜이 쌓이는 벌목된 나무들은 이미 그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장면에선 잘 나가는 다른 제지회사의 팀장, 최선출이 제지에 대한 오해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지가 나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건 오해이며 나무를 무분별하게 베는 것이 아니라 재생시켜 다시 벌목하는 것이라고요.
최선출의 말은 인간이 자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라는 일종의 변명이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논리는 인간 중심의 시각일 뿐,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재생’이 아닌 ‘대체’에 가깝습니다. 나무는 자유롭게 자라날 뿐이지만, 인간의 필요에 의해 형태를 잃고 종이로 대체됩니다.
영화는 '재생'과 '대체'를 혼동하는 인물들과 상황을 배치합니다. 두 가지의 본질적인 차이로부터 오는 아이러니를 이용하며 사회를 만든 인간이 되려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탈락하고 대체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데요.
소나무를 비틀고 잘라내 예쁜 모양을 만드는 행위이자 만수의 취미인 '분재 제작'과도 같은 맥락이죠. 이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로 확장시켜도 비슷합니다.
인간은 숲을 지배하는 척 하지만 그들 개개인도 사회 속 하나의 나무일뿐이다.
BBC는 무려 3억 개의 일자리가 AI로 대체될 것이라고 보도했으며 혹자는 2030년까지 전체 노동자의 14%는 직무 전환조차 불가능해 직업을 바꿔야 할 것이라는 통계를 발표했는데요. 또 코로나 19 이후 폭등한 제지 생산비용 역시 국내 대형 제지사들의 독과점 구조와 맞물려 권력 불균형이 더욱 극심해져만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불확실성이 가득한 사회는 효율성과 안전을 위해 언제나 더 나은 방식을 선택합니다. 벌목에 사용되는 인간의 기계들이 나날이 발전하는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필요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은 직장에서 해고되고 AI나 기계는 그 자리를 대체하곤 합니다.
결말부 제지공장에서 단 한 명의 사람, 만수가 수많은 기계를 관리하는 장면은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언제나 '어쩔 수가 없다'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덤이죠.
초반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만수와 그리고 후반부 면접장에서 “시대의 흐름이 바뀐 걸 어쩔 수 있나요”라고 너털웃음을 짓던 만수의 대비는 선출의 논리에 굴복한 개인의 모습과도 같은데요.
결국 만수는 벌목을 하듯 고시조를 직접 살해한 뒤 이 모든 건 가족을 위해서라며, 스스로를 감싸는 오해와 죄책감으로부터 도피하고 피해자의 시신과 자신의 영혼마저 나무뿌리처럼 집 마당 땅속에 감추어버립니다.
그 죄의 씨앗 위에서 자라나는 만수의 집안은 다시 살아난 게 아닌(재생) 다른 무언가, 다시 평화롭고 화목함을 연기하는 가정으로 대체된 것이죠.
원작 소설의 제목(액스, 도끼질)이자 '해고'라는 중심 사건, 제지라는 소재, 그리고 두 가지 모두 '어쩔 수 없이' 행해진다는 점. 위 요소의 연결성은 바로 다음으로 설명할 '만수의 캐릭터성'과 복잡한 주변 관계를 더 심화시킵니다.
결국, 만수가 분재를 만들며 나무를 통제하던 손은 타인을 해치고 자신을 파괴하는 도구로 바뀌며, 만수와 아내라는 나무에서 가지처럼 자라난 자식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의심합니다. 인간성마저 잃은 그의 새 일자리는 더 보여줄 필요도 없다는 듯 전등이 꺼져갈 뿐입니다.
남성성의 탐구
작품에서 강조되는 또 다른 키워드로는 '남성성'과 '가장'이 있습니다. 만수는 전통적인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발버둥 치는 인물인데요.
앞서 설명한 그의 취미인 분재 제작은 단순한 조형 작업을 넘어 자연을 통제하고(제지) 형틀에 맞춰 구부리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단단한 로프와 니퍼, 가위를 이용해 나무를 비틀고 잘라내는 과정은 개인이 사회의 이상향에 맞춰 스스로를 절단하고 조정하는 모습과 닮아 있죠.
만수는 이처럼 자연을 통제하듯 가족과 삶을 자신의 손아귀 안에 두고자 합니다. 그는 처음과 끝에서 콧수염을 기르며 마초적인 외형을 갖추는데 이는 산업화 시대의 남성상—강인하고 침묵하며 책임을 짊어진 가장—에 대한 복고적 환상과도 같습니다.
오늘날 직장 문화에서는 깔끔한 면도가 당연시되지만, 만수는 오히려 콧수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남자다움’과 ‘가장의 존엄’을 시각적으로 되새기는 것입니다.
마치 얼굴을 두드리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기하던 것처럼, 월남전에서 사용했던 권총을 간직한 그의 아버지처럼 과거의 업적과 역할을 불러오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실직자 집단 상담에서 반복되는 ‘가장’과 ‘남성’이라는 단어는 그가 속한 세대가 여전히 과거의 이상화된 남성상에 얽매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만수는 자신의 타깃이 되는 구범모나 고시조를 살해하는 것에 있어서 난처해하는데요. 단순한 죄책감 이상으로 그들 역시 자신처럼 ‘가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구범모의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며 만수는 자신의 아내에게 같은 불안감을 투영하고, 고시조가 어린 딸을 둔 아버지임을 알았을 때엔 생각 없이 자신의 딸에 관한 개인적인 하소연을 합니다.
만수는 이들과의 공통점을 통해 자신이 공격하는 대상이 곧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으로서 가족과 집안을 지키기 위해 폭력과 통제를 선택합니다.
이는 그가 사회적 역할에 얼마나 깊이 얽매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성과 가장의 이상화가 이끈 자기모순과 파괴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영화 속에서 이러한 남성성을 끊임없이 전복시킨다는 것입니다. 만수는 재취업에 성공하지만, 거대한 기계 공장에서 말없이 일하는 그의 모습은 모든 걸 통제하는 권력자라기보단 오히려 기계의 부품처럼 보입니다.
반면 그의 아내 이미리 (손예진)은 가정의 위기를 꿋꿋이 버티며 자녀를 돌보고, 심지어 만수의 범죄까지 감싸 안는데요. 이로써 영화는 ‘가장’이라는 역할이 더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오히려 그 역할이 무너지고 있으며 삶에서 마주치는 '어쩔 수 없는' 부조리들은 모두에게 공평하기까지 하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결국, 만수가 분재를 만들며 나무를 통제하던 손은 타인을 해치고 자신을 파괴하는 도구로 바뀌며, 아내와 아들에게서는 도덕적 신뢰를 잃고 그가 지키려 했던 가장의 존엄은 허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남성성을 넘어 인간성마저 잃은 그의 새 일자리는 더 보여줄 필요도 없다는 듯 전등이 꺼져갈 뿐입니다.
어쩔 수가 없는가?
아마도 가장 큰 불호 중 하나는 만수의 살인 행각에 이입하기 어렵다는 부분일 것입니다. 아무리 모든 걸 다 잃을 처지라고 해도 타인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또한 원작 소설에서도 제기된 문제인 '너무 극적으로 혐의를 벗는 주인공'에 대한 부분과 [아가씨] 를 기점으로 점점 대사와 행위 대신 미장센과 장면 연출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 역시 불호 포인트가 될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도 고시조와 구범모의 정체, 만수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줄줄이 대사로 지나가듯 설명된 부분이나, 구범모의 말괄량이 아내인 아라의 캐릭터성이 그저 만수가 미리를 잠깐 의심하는 단발성 해프닝의 재료로 이용되었다는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다만 이번 [어쩔수가없다] 가 박찬욱 감독의 가장 대중친화적인 작품이었던 만큼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이 물 흐르듯 재미있게 보았고, 해체해 뜯어먹는 재미가 있는 미장센들 역시 인상 깊었습니다.
[어쩔수가없다] 의 이질적인 스토리는 '가장'인 만수에게 이입할 것이냐, '연쇄살인범'인 만수에게 이입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로 입체적인 감상을 줌과 동시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지는 것이죠. 만수는 매 순간 선택을 했지만, 그 모두가 불가항력적이지는 않았으니까요.
진짜 어쩔 수가 없었을까?
만수를 비롯한 현실의 우리들 역시 '어쩔 수가 없다'라는 같은 변명에서 시작해 천차만별의 행동을 합니다. 반대로 아무 행동을 안 하기도 하고요. 혹은 천차만별의 행동을 변명삼아 결과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을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에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이 모든 현대인의 가슴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인을 자행한 만수에 대해 관객들은 '뭐 어쩔 수 있나'라는 말로 시작해 제각각의 해결방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노가다라도 뛰어야지", "장기라도 팔아야지", "죽여야겠지"
만수와 그의 가족은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 마당에 묻힌 시체를 코앞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수가 겪은 일들은 마당 흙을 타고 집 바닥에 퍼지고 자식들의 꿈에 묻어 그들의 미래 역시 되풀이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은 언제라도 '모가지' 당할 처지에 놓여 있지만, 역설적으로 모두의 손에는 도끼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저 나무를 벌목할 뿐인 엔딩 크레딧의 장면들은 앞에서 진행된 영화의 장면과 주제의식과 합쳐져 어딘가 잔혹하다는 감상을 줍니다. 더 효율적으로, 안전하게 변화해 가는 기술의 처음에는 아마도 도끼를 든 사내가 있었을 겁니다.
또 모든 것은 대체 가능해 보이지만,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해고’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가장의 위상, 남성성, 노동의 존엄, 그리고 인간성의 경계까지 밀어붙입니다. 만수는 분재를 손질하듯, 삶을 통제하려 했지만 결국 스스로 가지를 잘라낸 나무처럼, 그의 인간성은 점점 왜곡되고 맙니다.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눈물겨운 몸부림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의 무게를 핑계 삼아 타인의 생을 앗아간 또 하나의 도끼질이었을까. 영화는 이를 단정 짓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현실을 수긍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어떤 비극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만수는 그렇게 다시 일터로 돌아왔고, 도끼를 든 손은 종이 대신 사람을 잘라냈습니다. 누군가는 살아남았지만, 그 삶은 여전히 땅속 어딘가에 묻힌 채입니다.
가정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가장이 떠난 집에선 첼로 소리가 들립니다. 가장이 품에 안고 나간 것은 가정을 위한 책임감도, 사명감도, 자식의 따뜻한 뽀뽀도, 아내의 깊은 포옹도 아닌 흙 속의 침묵뿐.
4.0/5 - ★★★★
어쨌든, 어쩌다가, 어쩔 수가
Written by 사각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