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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가 킥복싱을 선택한 이유

「완득이」, 2011

by 사각예술

거울 - 한로로

mov_G1J821_20111012154828_3.jpg 얌마 도완득!

세상에는이 있습니다.

그 명칭의 개수만큼 구실도 천차만별—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해타산, 물질주의


완득이는 이러한 세상의 규칙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방황하는 소년이죠.


가난하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힘이 없다고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어른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하지만, 완득이는 그 말에 안심할 만큼 미처 자라지도, 체념하지도 못했는데요.


6.jpg 완득이와 어머니

완득이는 화가 날 때마다 주먹을 휘두르는 싸움꾼으로 자랐습니다.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깔보는 사람에게도, 또 그걸 우두커니 바라만 보는 세상에게도.


때문에 아직 미성숙한 완득이는 자신을 그 지긋지긋한 룰 안으로 끌여들이려는 모두를. 완득이를 세상으로 이끌어내려는 담임 동주와, 자신과 달리 완득이가 떳떳하고 번듯하게 살아가길 바랐던 아버지 역시 밀어내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작품은 완득이의 성장과 행복을 그가 요구받던 다른 길들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성공적인 대입, 벼락부자, 권선징악….


완득이는 왜 킥복싱을 해야만 했을까요?




플레이어

완득이의 성장


자신의 불같은 성격을 분출하기 위해서라기엔 완득이는 분명 착한 아이입니다. 또 때 묻지 않은 소년이기도 하죠. 격투기 시장이 활발하지도 않은 한국에선 완득이의 꿈은 아버지의 말대로 '어설픈 힘자랑'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요?


핫산.JPEG 우물 안 개구리
완득이 - 킥복싱 그거 손 발 다 쓰는 거 아니에요? 그냥 두들겨 패면 되잖아요.
핫산 - 싸움 잘하나 봐요. (넌이제디졌다ㅋㅋ)


겠냐? 모르면 맞아야지.

영화에 나오는 대로 실제 링 위에서의 전투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4.jpeg 끝없는 훈련

내 수를 훤히 읽고 있는 상대. 빡빡한 규칙과 함께 날아드는 주먹과 킥. 젊은 혈기로 부리는 억지는 통할 리가 없고요. 결국 도장 환불 사유를 제대로 경험한 완득이였지만 왜인지 완득이는 킥복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터질 것 같은 숨통의 감각을 기억하며 그 후로도 동주와의 에피소드, 풋풋한 첫사랑, 그리고 외국인 어머니와의 재회를 거치며 점점 자신이 그토록 기피했던 세상의 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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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니까 아프다

후반부 열심히 훈련을 거친 완득이는 다른 도장의 선수와 제대로 붙지만, 이번에도 얻어터지고 마는데요.


하지만 완득이는 노력을 배신당했음에도 환하게 웃습니다.


KO.JPEG 죽기보다 지기 싫었던 소년은 지고도 웃는다

룰이 없는, 링 바깥을 배회하던 그간의 삶은 제대로 된 패배조차 할 수 있었던가요.

길거리 싸움과 킥복싱이 다른 한 가지라면 쓰러져 자빠져도 여전히 링 위에 있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킥복싱을 통해 표현되는 완득이의 성장은 세상을 거부하던 반항아, 아웃사이더에서 룰을 받아들이고 '플레이어'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완득이의 혼란스러웠던 삶 역시 마찬가지죠.


결말부에서도 완득이의 사정은 어쩌면 조금도 나아진 게 없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불안하며 고요한 삶이죠. 그럼에도 싸움질과 킥복싱이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듯이, 싸움꾼과 플레이어는 작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mov_D968J3_20111012154826_1.jpg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승리의 값짐과 패배의 교훈은 오직 플레이어에게만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완득이는 세상이라는 경기장 위에 똑바로 서기 위해 킥복싱을 선택했습니다. 익숙한 주먹질과 낯선 규칙. 그 안에서 벌어지는 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그게 완득이로 하여금 처음으로

길거리 싸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느껴진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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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사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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