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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영 Jun 21. 2024

닫힌 문

동원은 한사코 지윤의 제안을 거절한다.

"야, 우리 나이에 뭘 합치니. 이렇게 가끔 만나서 같이 자고 여행 다니고 맛있는거 먹으면 되지"

"난 자기랑 한집에서 부부로 살고 싶어. 혼인신고 굳이 안해도"

동원은 15년전 상처한 사람이고 지윤은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신혼때 아이도 없이 헤어진 여자였다. 

"내 생각은 안해? 자기야 애 낳고 살기까지 했지만 난 제대로 결혼생활을 해본적이 없잖아"

"그건 니가 감당할 몫이지"라며 동원은 더 이상 이 얘기를 끌고 갈 의향이 없어보인다. 더 물고 늘어졌다간 또 사달이 날거 같아 지윤은 그쯤에서 이야기를 접기로 한다.



하지만 동원과 헤어져 집으로 오는 내내 지윤의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무리 과거있는 사람들이 만났다 해도 아직 결혼해도 될 나이고 잘 하면 둘만의 아이를 낳을수도 있는 시긴데도 동원은 한사코 합거하기를 거절한다는게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애정'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얘기를 가까운 친구 몇에게 하면 대뜸 "뭐할러 결혼해서 남자 수발을 들려고 해? 그 남자 말대로 해"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윤도 평범한 여자인지라 이른바 '남편의 그늘'을 느끼며 살고 싶은건 어쩔수가 없었다.


아무리 여권이 신장되고 여자들의 경제력과 권한이 상승됐다 해도 여전히 이 사회는 가부장적이어서 하다못해 집안의 전등을 하나 교체하려 해도 집에 남자가 있냐 없냐에 따라 기사들의 행동이 다르다는걸 느낄수 있었다.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더라도, 동원의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거나 하면야 그럴수 있지만 다들 스무살이 넘은 성인인데 아직도 아이들을 내세워 '볼성사납게 무슨 재혼'운운하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지윤은 몇번인가  '헤어지자'는 말을 해보기도 했지만 '우리 나이엔 다 이러고 산다. 각자 살면서 가끔 보는거지'라고 일축하기 십상이었다.



지윤은 그와 헤어져 집에 와서 거실 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갈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그와 단절하고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인가,등등의 사념들이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때 요란하게 컬러링이 울려댔다. 동원이었다.  정 안되면 헤어질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나서도 그의 전화,그의 메시지를 받으면 영낙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야, 같이 살고 안살고가 뭐 그리 중요해. 서로 사람이 있다는게 중요하지"라고 동원은 전화너머에서 담담히 말했다.

"날 사랑하긴 해?"

"우리 나이가 몇인데 사랑타령이야...그냥, 같이 가는거지 동반자로"

그 '동반자'라는 개념이 지윤은 마땅치가 않았다. 

"헤어져라. 그냥 사귀는 것도 아니고 니 돈 들어가면서 왜 밑지는 장사를 해?"

오랜만에 만난 대학동창 선규가 단칼에 둘의 관계를 정의했다.

"지금 니가 60이냐 70이냐...얼마든지 합쳐서 애도 낳고 살수 있는데 그걸 싫다고 하는 놈은..."

하지만 선규는 말끝을 흐렸다.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넌 어때? 넌 왜 혼자야" 애들 엄마랑 헤어진 지도"

"난 사람이 없다...마땅한 사람 있으면 당장이라도 재혼하려고 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

"니가 눈이 높은거지"

하며 둘은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 근처의 호프집에서 술잔을 부딪쳤다.

돈...안그래도 돈이 문제였다.

언제부턴가 동원은 은근히 생활비 일부를 지윤에게 대라는 요구를 했다. 그는 예전에 제법 잘 나가는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이따금 지방 강연이나 잡문을 기고해서 먹고 살다보니 사는게 팍팍할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대학생 아이 둘이 그런 아비를 챙기는것도 아니었다. 

비록 지방 송출 라디오여도 작가 수입이 웬만큼 되는지라 지윤은 '토'를 달지 않고 그가 필요해 하면, 또 때로는 그가 요구하지 않아도 일정액의 돈을 주곤 하였다.

"니가 돈줄을 끊어봐. 그래도 그놈이 너 좋다고 할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동창 선규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문득, 선규는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윤은 애정이란게, 연애란게, 물건 바꿔치듯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어서 머리를 내저었다. 술이 올라 운전을 할수도 없어 택시에 올라탄 그녀는 도중에 문득 동원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기사에게 행선지를 바꿔달라고 하고는 동원의 동네 입구에서 내렸다.

가로등이 몇개 있지만 고장난게 여럿이어서 어두컴컴한 골목을 걷다보면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어? 니가 왜?"

빌라 입구에서 전화를 하자 동원은 뜻밖이라는듯이 말을 했고 잠시후에 폐가같은 빌라를 나와 지윤에게로 다가왔다.

"술 먹었구나?"

"응. 좀. 동창 만나서"

"사내 새끼겠지"하고 그가 불퉁해하였다. 그런걸 보면 지윤에게 마음도 없이 돈만 가져가는 것 같지도 않다.

"나 사랑해?"

"야, 취했어. 가 그만"하고 그가 돌아서려 할때 뒤에서 지윤이 그를 안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구"

"난 이미 자기랑 결혼한 기분인데 자긴 아냐?"

"결혼은 무슨....그런거 안한다고 했잖아. 자유롭게 만나고 잠자고 여행다니고 그렇게 살기로 한거 아냐 우리?"

"난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라는 그녀의 말에 동원이 뜨악하게 그녀를 쳐다본다.

"그럼 우리 정리할까?"

그가 제법 심각하게 말하자 지윤의 가숨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무슨 얘기야...어떻게 헤어져 우리가"

"그니까 다신 그런 얘기 하지 마. 알았지?"하고 그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걸으려 한다.

"가라구 이렇게?"

"그럼 애들 있는데 집에서 잘래?"

"못잘것도 없지...애들한테 내 얙긴 했구?"

"나중에...나중에 하지 뭐"라고 하고 그가 그녀를 끌고 대로변으로 향한다. 이사람과는 결론이 안나는구나 싶다. 그렇게 그가 잡아준 택시에 지윤이 오를때 "돈 50만 부쳐라. 애들한테 쓸건데 그게 없네"라며 토를 달았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그에게 돈 50을 이체하고나자 지윤은 허탈해졌다. 요즘 와서는 만날때면 거의 매번 돈 얘기를 언급하는 동원의 진심이 헷갈렸다. 선규의 말대로 돈이 건너가지 않아도 이 관계가 유지될까 싶어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동안 차는 지윤의 아파트 단지를 들어서고 있다.


"여행?"

"응...일박이라도 아님, 당일치기라도 바다 보고 오자"

"애처럼 바다는 무슨"하며 동원은 단박에 지윤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가을에 나 남도에 낚시 갈건데 그때 따라오든가"

"얼마나 가 있을건데?"

"한 열흘?"

그말에 지윤의 머릿속은 수백이 또 들게 생겼다는 생각뿐이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턴가 동원은 밥을 먹어도 커피를 마셔도 자기 돈 한푼을 내지 않은게 떠올랐다. 모든 데이트 비용은 지윤이 대야 했고 그렇게 그를 만나고 난 다음엔 '내가 매달리는 건가?'라는 의혹에 휩싸여야했다.

"가을에 낚시 가더라도 동해 한번만 갔다오자"

"나 넘겨야 하는 칼럼있어. 끊어"하고 그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다.

지윤의 소망이나 바람은 들은척도 않고 동원은 자신의 의견만 내세운다. 그렇다면 설령 지윤의 소원대로 한집에서 살더라도 부딪칠게 뻔하고 그러다 헤어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야 월차 내면 되지. 그놈이랑 헤어졌냐?"

일주일후 선규에게 동해를 다녀올수 있겠냐는 말에 선규는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는 정말 휴가를 내고 그녀를 동해에 데려다주었다.

"그놈이랑 헤어지면 나한테 오든가"라고 그가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읊조렸다.

"미쳤어"라고 지윤이 배시시 웃자 선규는 머쓱해하였다. 그리고는 자정이 넘어 다시 서울로 차를 몰았다.


"누구랑 갔다고?"

"동창....선규라고"

"사내놈이랑 여행을 다녀왔어?"

동원이 제법 발끈하는 티를 냈다. 저런걸 보면 자신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것도 아닌거 같아 지윤은 내심 안도하였다.

"잤냐 둘이?"

"미쳤어? 그냥 친구야. 자기가 안가니까 가자고 해본거야"

"나 그렇게 통 큰 놈 아니다. 이번 한번이다. 알았어?"하고 동원은 자기가 한번 봐준다는 식으로 얘기를 매듭지었다.


그리고는 그날밤 모 인터넷신문에 동원의 미학칼럼을 읽는데 지윤의 폰이 울렸다. 선규였다.

"나 실은, 너랑 자고 싶었어. 근데 아직 너 있잖아 누구"

라고 선규는 술이 좀 올랐는지 혀가 살짝 꼬여 말했다.

"나 그 사람 사랑해"

"알지..알았다. "하고 선규는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다 큰 애들이랑 셋이 살기엔 이집이 넘 좁아. 니가 좀 도와줘야겠다"

"당신이 내 집으로 들어오고  애 둘이 같이 살라고 하면 되지 않아?"

"지 엄마 일찍 가서 내 손이 필요한 놈들이야"

"당신 애들 다 컸어"

"시집 장가갈때까진 내가 케어할거야"

그 말에 지윤은 아득해진다. 사별자에게 자식의 존재는 '신'과 같다는 글을 읽긴 했지만 이 정도면 거의 병적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넘어 더 큰집으로 세를 옮길 비용을 대라는게 주된  의미라는 것이다.

이게 맞는건가, 지윤은 밤새 고민을 하였다. 아무래도 대출을 받아 해줘야 할텐데 그게 과연 옳은일까가 끝내 결론이 나질 않는다.

"작게라도 거실 따로 나온 방 두칸짜리 세가 괜찮게 나왔다"는 문자를 동원으로부터 받은건 그로부터 사흘후였다. 빨리 돈을 부치라는 얘기였다. 이럴때 속사정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데 마침 선규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녁 같이 먹자구"

"할 얘기가 있어. 좀 만날래?"

동원의 집세 이야기를 하자 선규는 화가 잔뜩 나버린다.

"그놈, 니 돈 보고 만나는 거 모르니? 돈 끊어봐. 그래도 만나는지"

"그럴까? "

그러는데 갑자기 지윤의 아랫배가 꼬이는 느낌이 든다. 며칠전 갑자기 회가 먹고싶어 집앞 수산물 가게에서 한팩을 사다 먹은게 탈이 난 듯하다. 화장실좀.....하고 그녀가 레스토랑 화장실을 다녀오자 선규가 굳은 얼굴이 돼있다.

"왜?"하고 그녀가 자기 물을 한모금 들이키자

"이제 끝났어 그놈이랑"

"뭐?"

"내가 니 폰으로 연락했다. 결혼할 사람이라고"

"!..."

"그래, 널 위해서라기 보다 니가 좋아서 내가 한 짓이라는 말이 더 맞을거야"

"그런 법이 어딨어! 그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하는데 눈물이 지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레스토랑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동원의 동네로 가는 내내 그녀는 계속 울어댔다. 그런 그녀를 초로의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힐끔거렸다...



"너 양다리였니?"

아무말없이 담배 한대를 다 피운 뒤 발로 눌러 끄며 동원이 내뱉았다.

"그런거 아니고"

"몰랐어..꽤나 순정적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게 아냐. 걔는 그냥"

"됐고, 갚을테니 돈이나 부쳐"

"!...."

"나 이사한다니까?"

"우리...끝난거야 이렇게?"

"끝은 니가 냈잖아. 돈이나 줘"하고 그가 자기 손을 내밀었다.

"...끝났다면 더는 이러면 안되잖아"

"그럼 카드라도 한장 주든가.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라며 그가 내민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재촉을 하였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니가 뭐 특별해서 사귄줄 알어?"하는 동원의 눈빛이 그날만큼 낯설게 느껴진적이 없었다.



동원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자기집 현관앞에 도착한 지윤은  도어락 비번이 생각나질 않았다. 한참을 에러를 내는데  문자 알람이 울렸다. 선규였다.

"미안. 내가 오지랖을 넘 부린거 같다. 둘이 잘 되길 바란다"라는...

순간 화가 솟구친 지윤이 문자창의 전화기 아이콘을 눌렀다. 벨이 서너번 울리자 선규가 전화를 받았다.

"너도 지겨워. 똑같은 놈들이야"라고 퍼붓고 전화를 끊자 그제서야, 비번이 생각났다... 지윤은 또박또박 비번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잠시후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철문은 굳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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