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물음에 난희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한다. 안보고 산 세월이 무색하게 진주는 난희를 sns에서 찾아내 dm을 보내왔다. 여고시절 둘은 그리 막역한 사이도 아니었다.어쩌다 가까워질만하면 진주는 일정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고 난희도 굳이 그 선을 넘어서까지 진주와 가까워질 이유가 없었다. 진주가 그런 선을 긋곤 한것은 본인 입으로도 종종 내뱉었지만 대대로 의사집안이라는 '명문가'의 자식이라는 것과 그에 따른 막대한 재산을 과시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그렇게 난희와 진주는 늘 일정선을 가운데 두고 어정쩡히 3년을 보냈고 졸업후 공교롭게 같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대학캠퍼스라는게 그리 쉽게 마주칠만큼 좁은 게 아니어서 대학 4년 동안 딱 두어번 마주쳤다. 한번은 시험철에 도서관에서, 그리고 또 한번은 졸업식 당일 운동장에서...
그때 먼저 인사를 건네온건 진주였다. "졸업축하해" 라는 그녀의 말에 난희는 "너두"라고 대답했지만 졸업이란게 딱히 축하받을 일도 아니고 더군다나 취업조차 안된채로 졸업한다는게 한심하게 여겨졌는데 딱히 정도 없는 상대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그에 반해 진주는 대학 4년때 이미 s대학 출신의 현직 판사와 약혼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난희는 절친도 아닌 상대의 신상 이야기까지 들어야 할만큼 한가하지도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모른척 했다.
졸업전 어떻게든 취업을 해보겠노라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낙방의 쓴맛을 본 난희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대학 선배가 주선한 미팅자리에서 대기업에 다닌다는 지훈을 소개받아 결혼에 이르렀지만 둘은 1년만에 갈라섰다. 남의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모르지 않는 진주는 그저 '성격차이'라고 했지만 실은 지훈에게는 오랜 여자가 있었다. 지훈 집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한. 하지만 지훈은 결혼후에도 그녀와 연락했고 만났고 때로는 외박까지 하기도 하였다.
친구중 유일하게 선미에게 사실을 털어놓자 선미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빨랐다. 애 생기기 전에 헤어져라.
선미 말대로 애라도 있었더라면 힘들었을 이혼을 난희는 어렵지 않게 해냈고 위자료 3000을 받는 것으로 지훈과는 인연을 정리했다.
'요즘 시대 이혼이 뭐 죈가요'라는 취업 면접을 여러번 보았지만 다 된거 같다가도 결과는 늘 불합격이었다. 심지어 이런 면접관도 있었다. '그럼 더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네'라고. 이혼한게 죄가 아니라는 세상에서 이혼했기에 더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수긍할수 없었던 난희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나이 서른이 다 돼서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알음알음 어렵게 얻은 자리였고 그녀는 거칠고 고된 방송환경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어떻게든 버티려 노력중이었다. 그럴때 진주로부터 dm이 날아왔다.
"나야 진주. 너두 무심하다. 결혼, 잘 안된건 들었어. 어떡하니..."
진주는 여전하구나. 그 도도함, 오만함, 남을 배려하지 않는 그 에고, 그러고 난희는 그 메시지를 지웠다.. 그러자 며칠후 다시 dm이 날아왔다. 차단하지 않은게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늦었고 진주는 의례적 말이라도 해야 할 터였다.
"나 방송일 하면서 잘 살아"
"거기가 좀 그렇다며. 여자들은 다들 힘들게 견딘다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기에 난희는 더더욱 진주가 가증스러웠다. 콕집어 '여자들'이라 명명한것은 여자들이 몸을 굴려 버텨낸다는 의미로도 들렸기에 난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번 보자 얘"
진주는 보고싶닥고 이야기했다. 뜬금없이?
여고때부터 대학 4년까지를 합쳐 모두 7년간을 데면데면하게 지내온터에 새삼 나이 서른 넘어 만날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진주는 일방적으로 약속장소며 시간을 통보했다.
연휴가 껴서 사흘치를 몰아서 원고를 쓰고 녹음참관을 해야해서 지칠대로 지친 난희는 이 참에 약속을 깰까 싶었지만 결국엔 진주를 만나러 나갔다.
"넌 어쩜 여전하니..."
간드러진 진주의 웃음을 보자 약간 긴장모드의 난희의 신경들이 일제히 무장해제가 되었다 . 미우니 고우니 해도 어릴적 인연이고 진주가 번번이 '선'만 긋지 않았으면 절친이 될수도 있는 경우였다.
둘은 나란히 파스타를 시켜먹었다.
"재혼할 생각은 없구?"
진주는 난희가 안됐다는 듯이 물었다.
"아직...일이 좋아. 돈버는게 재밌기도 하고. "
"힘들잖아"
"뭘 한들 힘들지 않을까?"하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언제 집에 놀러와. 우리 막내 이쁜짓 한다 요즘..."이라며 진주가 웬일로 '초대'를 했다.
"그래 한번 보자"라는 의례적 인사를 나누고 그날은 헤어졌다.
그러나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진주는 또다시 연락을 해왔다.
자기가 잘 아는 고깃집이 있다며 점심을 내겠노라 했다.
이런 진주의 느닷없는 행동에 난희는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하지만 결국엔 녹음을 마치고 약속장소인 s고깃집으로 향했고 밥을 먹는 내내 진주는 남편 이야기를 해댔다.
"우리 아저씨 판사잖아"
이 말에 , 또 시작이군, 하고 난희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들어주마 하는 심정으로.
"너 언제 쉬니?"하고 진주가 조금은 다급해하며 물었다
도대체 그 속을 알수 없는 진주와 만난 뒤 난희는 한참을 그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다 선미에게 털어놌았다.
"지도 이제 나이먹고 애까지 있의니 친구들 귀한거 알게 된거지"라고 선미가 말했다.
그런가싶어 난희는 쉬는날 진주의 집을 찾았다.
거의 연년생이라는 진주의 세남매를 보면서 난희는 살짝 부럽기도 했다.
"우리 세째 넘 이쁘지?"
이젠 그런 화법의 진주가 어색하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세째는 누가 보면 사내앤줄 알 정도로 걸걸하고 행동도 시원시원했다.
"얘 하마터면 지울뻔 했잖아"
무슨말이냐고 묻자, 임신기간중에 의사가 아무래도 '기형'같다고 유산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그런에 우리 천주교잖아. 특히 남편이 독실해. 그래서 기형이라도 그냥 낳아서 키우기로 하고 낳았거든? 근데 세상에 , 셋중에 젤 건강한 놈이 나온거야"라며 셋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진주를 보면서 난희는 선미의 말이 떠올랐다. 나이들어 변한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날 진주의 아파트를 나서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불쑥 이런말이 들려왔다.
"죄다들 도장찍는 사주라는데"라는.
무슨 말이야? 하고 난희가 되묻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또 보자..."라며 손을 흔들어주는 진주의 모습이 사라지자 난희의 온몸엔 나른한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리고는 개편을 맞아 방송국이 온통 어수선하던 차에 난희가 쓰고 있는 프로그램 pd가 바뀐다는 얘기가 들려왔고 같이 쓰던 작가들은 서둘러 다른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 왜들 저러지? 하고 난희가 영문을 몰라하는동안 소문처럼 pd가 바뀌었고 그는 오자마자 작가체인지를 단행해버렸다.
아직 방송국 생리를 몰랐던 난희는 그렇게 일자릴 잃었고 또다시 백수의 생활로 돌아와 있었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해봐야 뒤에서 수군대기나 한다는걸 아는 지라 선미외에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주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다시 연락이 왔다.
"내가 일자리좀 알아봐줄까? 우리 외삼촌이 출판사 하잖아. 너 글 잘 쓰니까"
"됐어. 안그래도 좀 쉬고 싶던 차야..."
"한번 보자. 우리 본 지 오래 됐잖아"
얘가 진짜 바뀐건가 싶어 반신반의하며 난희는 약속장소로 나갔다. 호텔 커피숍에서 누군가와 만나는건 처음이라 마치 선이라도 보러 가는양 마음이 두근거리기까지 하였다.
의례적인 안부의 말이 오간 뒤
"우리 아저씨 믿지?"하고 진주가 운을 뗀것이다.
실물 한번 보지도 못한 친구남편을 왜 난희가 믿고 말고 해야하는지를 몰라 풋, 웃음이 새나오는걸 억지로 참았다.
"무슨 일인데? "
"있잖아...."하다가 진주는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호텔 커피샵의 비싼 커피를 마시고 헤어지면서 난희는 어쩐지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될거라는 예감에 젖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호텔에서 만난 이틀후 진주는 불쑥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부스스한 목소리로 난희가 전화를 받았음에도 진주는 깨워서 미안하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너 이름좀 빌려줄래?""
난데없는 이야기에 난희는 잠이 한꺼번에 달아났다.
"무슨 얘기야?"
"사례는 할게. 우리 아저씨 변호사 개업하거든"
그것과 난희의 이름이 무슨 상관인지 도통 알수가 없어 "그런데?"하고 천연스레 되물을수밖에 없었다.
"통장....다들 차명 계좌 하나씩은 갖잖아. 세금때문에..."
그순간 난희는 왜 느닷없이 진주가 자기를 찾아내 밑도 끝도 없이 접근을 해왔는지 알수가 있었다...순간, 자기가 만약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남편과 자식이 있어도 이런 제안을 해왔올까 의심이 들었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걸 굳이 내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난희는 '하루 이틀 생각하고 답을 주마'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기집애. 연락 한번 없니"라며 진주가 다시 전화를 해온 날 난희는 왜 그녀의 전화번호를 차단않고 있었는지 자신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만나. 우리 예전에 먹은 고깃집 기억하지? 내가 점심 살게"라는 말에 난희는 싫다고 당당히 대답하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며 약속장소로 차를 몰았다. 그 3년간 그녀는 드라마를 쓰기 시작해 단막극 두어편을 내보낸 드라마 작가가 돼있었다.
"그바닥, 여자들은 다 그렇고 그럻게 버틴다는데"
언젠가 들어본 말을 진주는 되풀이했다.
"아저씨 일은 잘 되시구?"
"성격이 대쪽같아서...사무실도 원래 서초동에 하나, 신촌에 하나, 두개 했는데 신촌거는 접었잖아 그냥 성당일 열심히 할면서 살아"
진주가 어쩌면 자신의 약점일수도 있는 이야기를 꺼내자 난희는 그녀를 경계하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너 잘쓰더라. 니거 봤어 다"라며 진주가 방긋 웃기까지 하였다.
좋은 인연은 오래 걸려 만들어진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둘은 고기 4인분을 해치웠다.
"이동네 , 고기 맛있는 집 또 있어"라며 진주는 폰으로 지도 검색까지 하며 보여주었다.
"그래, 다음엔 내가 살게"라며 난희가 반응하자
"너 혼자 가서 먹으라고"라며 진주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나 혼자?" 하고 난희가 뜨악해하는데 진주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며칠후 이번엔 난희가 고기를 사야겠다는 마음에 진주에게 전화를 했을땐 차단 메시지가 또박또박 들려왔다.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사람은 역시 안변하는 구나"
선미가 전화너머에서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지가 한짓은 생각 안하는 애잖아. 지가 까이는건 못참고, 지가 까야 된다 생각한거지"
선미와의 통화를 끝내고 난희는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그러자 '성당일에 열심'이라는 그 보지도 못한 남자가 '차명계좌'운운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러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방송국에서 몇번 눈인사를 나눈 pd황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이번에 특집을 하게 돼서요. 이작가님 다른 스케줄 없으시면..."
그말에 난희는 더이상 진주따위로 혼란을 겪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지금 당장 방송국으로 가겠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