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막바지에 이르면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진다.더는 받을 상처가 없어서일까? 바로 며칠전 거의 반백년만에 우리 국민은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계엄은 새벽에 해제되었지만 그 몇시간이 국민에게 안긴 굴욕과 수치심은 이루 말할수 없이 크고 깊었다.
이때 내 머리에 떠오른 영화가 바로 <서울의 봄>이다. 얼마전 열린 국내 영화제에서 주요상을 온통 휩쓴 명작이면서 동시에 웰메이드 무비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고 무엇보다 1212 사태를 그대로 재현한듯한 절묘한 미장센과 연출력이 돋보인 영화라 하겠다.
왜 우리는 이 나락의 절망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할까 ,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서울의 봄>이 그런 한가닥 희망을 제시하며 엔팅 크레딧을 올린건 아니다. 영화는 2시간이 넘게 온통 야간, 새벽에 촬영돼 인물들의 실루엣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 흑백영화를 방불케하는 장치들을 활용하였다. 그래서 더더욱 그날의 긴박함과 절망감이 깊게 묻어났는지도 모른다.
바로 얼마전 오랜 독재끝에 전직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고 권력의 공백기를 맞은 틈을 타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결국 주동자가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우리의 민주화는 오랫동안 군홧발에 짓밟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영화는 그날밤의 이야기를 축소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그 어느때보다 구국의 열망이 가득한 이 시점에 <서울의 봄>은 우리에게 뭘 시사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굳이 던져본다면 그 답은 어렵지 않게 나올것이다. 한번 잃어버린, 놓쳐버린 '자유'를 다시 얻기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워낙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라 셀링 포인트를 몇가지로 요약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 난리중에 일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어있던 국방장관의 모습이 가장 인상깊게 남았다.
바로 며칠전,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소추안 의결때 고작 세명을 뺀 나머지 모두가 불참해서 결국엔 투표함을 열지도 못하게 했던 '그들의 비겁함'이 주던 모멸감이랄까, 그런것이 숨어있던 그 국방장관의 추레한 모습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도 있지만 그 영웅, 아니, 진정한 충신은 결국 그들의 총칼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쿠데타를 지휘한 보안사령관 전두광과 그에 맞서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수도경비 사령관 이태신의 팽팽한 기싸움과 비극적 결말에 관객은 숙연해지지 않을수가 없다.
무릇 정치란 공기와 같아서 있는듯 없는듯 존재해야 한다고 했거늘 대한민국은 그 정치로 인해, 그 위정자들로 인해 국민의 삶 자체가 버겁고 힘들기만 하다. 경제는 파탄나고 국격은 실추되고 수많은 음해가 난무한. 언제나 우리는 이 절망끝에 '희망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게 될까? 이시국에 희망의 노래가 가능하긴 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