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의 삶을다룬 영화는 많지만 연인간의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영화 <nowhere special>은 부자간의 이야기고, 아이를 두고 죽기엔 너무 젊은 아빠, 아빠를 잃기엔 너무 어린 아들의 이야기여서 누선을 자극할수밖에 없음에도 영화는 대단한 자제력을 발휘하며 흘러간다.
아직 한창나이의 30대 아빠 존은 불치병에 걸려 죽을날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그에게 딸린 어린 아들 마이클. 아이는 이제 갓 말을 뗀듯한 베이비톡baby talk으로 아빠의 마음을 더더욱 애절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수많은 위탁가정을 소개받지만 아들 존을 마음놓고 맡길수 있는곳을 아빠 존은 결정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저승으로 아들을 데려갈수도 없는 존의 고민. 그의 선택은?
위탁 가정들은 어떻게든 아이를 맡고자 오버를 한다거나 내놓고 마이클을 거절한다거나 하는 '남의 아이'에 대한 부담스런 상황을 한결같이 보여준다.
죽음은 이별이다. 너무나 단순한 명제지만, 그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하는것이 이상적일까,라는 제법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고 할수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우리가 해야 하는것은 역시 '살아온 생의 정리'임을 조용히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여정을 거치며 죽음과 보다 친숙해지고 남겨두고 가는 삶의 흔적들에 젠틀한 이별을 고할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영화는 편부모 슬하 아이의 문제도 동시에 제기한다. 아이를 낳기만 하고 양육하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어른의 세계를 에둘러 고발하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싸구려로 전락하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문제가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이 세태에 , 편부슬하의 어린 아들이 이집 저집 예비 위탁가정을 떠돌며 받아야 하는 상처와 모멸감은 자신의 성적 욕구만 채운뒤 뒤돌아보지 않는 어른, 기성세대에게 일침을 가하는 메시지라 하겠다.
결국 존은 어린 아들 마이클의 위탁가정을 결정했을까? 했다면 어떤 가정일까? 나이스하게 아이를 양육하고 식구로 포용해줄만한 인격과 사회적 위치, 경제적 견고함을 가진 가정일까? 그것은 보는 이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이야기는 특별히 '드라마틱한 구성'에 얽매이지 않는 차분함을 끝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대체 끝이 뭐란 말이야'라고 안달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존의 결정은 그것을 한번에 뒤집는 은근하면서도 대단한 반전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볼만한 영화'인 것이다.
신변을 비관한 부모들이 심심찮게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감행하는 세태에 이 영화는 그래서 더더욱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부모가 있으면서도 고아원에서 크는 아이들의 수가 적지 않음 또한 이 영화와 대비되는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꼭 천륜이 아니어도 정과 책임으로 맺어진 가족도 가족임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다시한번 제시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근래와서 회자되는 진정한 의미의 '보통의 가족'은 아닐까? 우리가 잃어버린 가정 큰 안타까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움'일지도 모른다는 예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