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큰 노란 주전자를 내가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 1인 가구를 시작하면서 작은 주전자를 사용하는 게 진리인 요즘 큰 노란 주전자를 보는 경우는 일단 마트를 가면 눈구경을 하고 그다음은 엄마집을 가는 경우이다.
엄마는 아직도 집 뒤켠에 가마솥 한 곳을 유지하고 계신다. 가마솥의 기능은 다양하다. 때로는 그 지독한 수동이 지겨워서 엄마 몰래 버리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제일 먼저 가마솥에 물을 부어서 빨래를 하시거나 아니면 식기류들을 청소하신다. 이렇게 날이 쌀쌀해지면 롱기장 니트를 입으시고 커피를 드시면서 불 앞에서 불멍을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신다.
몇 주 전 집을 갔을 때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아침부터 분주한 엄마, 엄마는 늘 분주했다. 내가 어릴 때도 지금 성인이 된 내가 쉬러 갈 때도 바쁘시다. 그래서 늘 난 "엄마 좀 쉬면 안 될까?"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내가 쉬면 일은 누가 하니?"라고 돌아온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잠시 하늘멍을 하는데 엄마가 부르셨다.
세상에 보리를 볶고 계셨다.
나는 "아니 요즘 누가 이렇게 먹어" 괜히 나는 짜증이 나서 톤이 올라갔다.
엄마는 "다들 편하게 먹지, 그런데 이렇게 먹는 게 달라. 나도 편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하니 이렇게 살라고 배우고 이게 내 습관인데. 됐어. 싫으면 말아"
엄마는 내심 속상하신지 내손에서 큰 주걱을 뺐으셨다. 순간 죄송한 마음이 들어 "아니 내가 싫다는 게 아니라 엄마, 지금은 손목이 그나마 덜하니 그렇지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힘들어서 못 들어요. 그러니 좀 작게 하자는 거지.." 하고 눈치를 봤다.
엄마는 "알았다" 하시면서 내내 볶으셨다.
그렇게 오후를 내내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는 보리치를 마셨다.
아 향이 정말 좋았다.
역시 노력이 돌려준 보답이라는 생각에 "맛이 좋네.."라고 나도 모르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너 집에 가면 내내 내려 먹는 커피보다 나는 두 배는 좋다 , 안 그려?" 웃으시며 말씀하시는데
나는 "그렇네"라고 두 잔을 마시는데 가을을 표현한다면 그래 보리차이겠지 싶어서 괜히 울적하기도 하고 괜히 푸근하기도 하는 극과 극의 마음을 달리는데 보리차 하니 예전 어릴 적 생각이 났다.
델몬트 병에 보리차가 있으면 그 병을 모시듯이 들어서 한 잔을 마시고 얼음을 넣어서 마시면 정말 콜라보다 맛이 좋았다. 뻘뻘 흘려 땀을 녹여낸 음료수가 어린 내게는 과정보다는 결과가 먼저 보이던 나이였으니 엄마의 노고는 일단 접고 맛이 좋아 마루에 앉아서 두 잔을 마시면서 "좋다" 하면서 숙제를 했다.
어떨 땐 쓴 맛이 올라와서 야금야금 버리기도 했지만 없어질 때즈음 되면 귀신같이 병에 채워지는 보리차가 신기해서 엄마에게 물으면 엄마는 웃으시면서 "모르지 우리 집에 두꺼비가 있는지" 나는 "두꺼비?" 하고 물으면 엄마는 "그 일 열심히 하는 두꺼비가 엄마도 너도 모르게 해 놓고 갔나 보다. 호호호" 웃으셨다. 나는 그래서 정말 그날 하루는 두꺼비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 엄마에게 신중하게 "엄마 진짜 두꺼비야?"라고 물으면 엄마는 웃으시며 "엄마가 두꺼비야"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괜히 화를 내며 "엄마 나 내내 찾았어"라고 삐지면 엄마는 "우리 딸은 부지런하네' 하시며 괜히 노른자가 많은 계란을 주시며 맘을 풀어주셨다.
어제 몸이 아팠다. 일교차에 이리저리 몸이 좋지 않다 보니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나 보다. 이를 알아챈 동료가 "어디 아프세요?"라고 물어서 난 "아뇨"라고 했지만 숨길 수 없었다. 난 자리에 일어나서 괜히 보리차 티백을 들고서 멍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가을엔 보리차죠. 보리차 한 잔 하세요" 동료는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우리 둘은 티백을 두고서 이야기를 했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엄마가 보내 준 보리차를 들고 왔다. 맛이 좋다.
가을이 가기 전 가을 보리차를 마시며 가을을 즐겨 볼 생각이다.
어디도 못 가는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싶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