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1이 되도록 모의고사를 한 번도 풀어본 적이 없다.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1. 내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모의고사, 그리고 수능보다 현재의 학교 공부가 더 중요했고, 2. 모의고사를 공부할 시간에 내가 원하는 것들-동아리, 학생회, 취미, 독서, 인터넷 서칭 등-을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학교생활과 학교 공부, 그리고 내 가치관과 맞는 일에만 집중하였고 남들 다 준비한다는 고1 3월 모고라던지, 고등학교 수학 선행이라든 지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솔직히 '에이 고1 올라가는 겨울 방학에 시작해도 잘 하겠지'이런 마음으로 모의고사 공부를 '미루기도'하였다.
중3 여름방학이 되자 조금 불안해졌었다. 다들 학원에서, 그리고 집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나만 너무 노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조금 바꾸었다. 고1 올라가는 겨울방학이 아니라, 이번 여름방학부터 정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기숙사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점으로 향했고, 중학교 3년간 '제대로 된'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에, 중학교 3년 치 과정을 복습할 중학생용 책들을 사서 풀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던 방학에, 내게는 '쉬는 기간' 그 자체였던 그 고귀한 방학에 갑자기 문제집을 풀고 단어를 외우려니 너무 힘들어 '매일매일 꾸준히' 공부를 하지는 못하였지만, 내 기준에서는 '아휴 힘들어' 느낌의 여름방학을 보냈었다.
중3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자 나는 서점에 가서 모의고사, 그리고 수능 관련 도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풀어본다는 <자이스토리> 시리즈부터, 문법이 부족한 것 같아 <떠먹는 국어문법>, 어디선가 꼭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천일문>이라는 영어 구문독해 책도 샀다. 또, '고1 것을 모두 예습하고 가겠다!!'라는 마음으로 EBS의 <고등예비과정> 시리즈, 국영수사과한, 까지 모두 결제하였다. 그렇게 나는 대략 13만 원어치의 책을 사서 서점을 나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강'도 결제하여-비싼 사설 인강도 아니었다. EBS 책 샀으니 EBS 것을 들어야겠지 싶어 EBS 무료 인강을 들었고, <천일문>은 꼭 인강과 함께 보라고 해서 5만 원 주고 강남인강 1년 치를 결제했다.-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1/3 정도가 지나 <자이스토리>의 첫 장을 풀기 시작했을 때는 솔직히 재미있었다. 아니, '안도감에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중3 내내 한 번도 모의고사 관련된 것을 해본 적도 없는데 생각보다 '잘' 풀어서 약간의 우월감에 젖었던 것 같다. 이대로만 한다면 '좋은 등급'을 받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는 문제집에 동그라미만 그려지니 기뻐서 정말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뒷장을 풀게 될수록 점점 우울해졌다. 동그라미만 있던 종이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다시 불안감만 쌓여갔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하는 불안감에 시작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정시 공부는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6월 모의고사가 한 달하고 3주 정도 남은 시점, 다시 모의고사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모의고사 공부를 할수록 걱정은 쌓여만 갔고, 내가 원하는 이우학교에서의 삶과 지금 나의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졌었다. 그럼에도 '좋은 등급'을 맞고 싶어서 모의고사 공부를 더 해나갔지만, 그 이유 뒤에는 '불안감'이라는 밑바탕이 깔려있었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나의 감정. '잘 되기 위해'라는 말로 감추었던 나의 감정은 결국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농배를 가는,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재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내용들로 가득 찬 꾸밈없는 대화였다. 중고 대안학교를 다녔다는 공통점, 그리고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대안교육을 받은 차이점을 동시에 지닌 우리. 나 자신으로서 하고 싶은 것, 그리고 한국의 청소년으로서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것. '좋은 대학'에 가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지방대'를 가면 역시 대안학교라서, 평생 비대학 청년으로 남거나 잠시 대학을 가지 않는 선택을 하였을 때. 사람들이 우릴 바라보는 시선과 진짜 우리의 모습. '대안학교'라는 공간 사이에 숨겨진 진짜 우리.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그리고 어딘가 불안한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재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하며 진짜 공부, 그리고 배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나는 왜 공부하는가?' 배움을 얻고 싶어서, 다양한 경험을 위해서, 뭔가 하나는 열심히 해보고 싶어서,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고 싶어서, 남들보다 뒤처지기 싫어서, 공부 안 하면 대안학교라서 그런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그리고 불안해서. 대학에 가지 않는 삶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경험이 없다. 단지 '비대학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지' 그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대학은 꼭 가야만 하는, 가지 않으면 평생 '힘든' 인생을 살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재이와 이야기하며, 그리고 하루 동안 홍성에서 농촌배움활동을 하며 '배움'이라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한 공간과 시간이 대학과 20대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대학을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내가 공부할 것, 그리고 배움을 얻을 수단과 방법은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는 모의고사 공부를, 그리고 정시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물론 그 공부를 하는, 그리고 할 사람들을 말릴 생각 따위는 없다. 지금 이런 결심을 하는 나조차도 시간이 지난 후 갑자기 수능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은 지금 당장 뜻이 없는 모의고사 공부를 할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그리고 나를 위한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서이다.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단지 '불안하기 때문에'하는 모의고사 공부는 오히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간에 학교 공부와 자치를, 그리고 독서와 대화를 더 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 그리고 진짜 배움을 얻고 싶다. 그래서 나는 모의고사, 그리고 정시 공부를 그만두기로 했다.
앞으로 나는 더 많은 것을 해보려고 한다. 잠시 손을 놓았던 독서도 다시 시작할 것이고, 사회학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 또 새로운 학문-인문학, 철학, 인류학-에 도전해 보고 싶고, 국회에 나가 차별 금지법 제정 연대의 농성에도 참가해 보고 싶다. 블로그에 더 정기적으로, 그리고 자주 좋은 글을 쓰고 싶고, 학교생활과 과제, 그리고 자치도 더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
내가 모의고사를 위한, 그리고 수능을 위한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을 얼마나 잘 사용할지는 나 스스로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다. 아마 난,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