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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 Engineer Sep 09.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귀자의 책 <모순>을 읽고

    지난달에 <모순>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심지어 어제 잠깐 봤던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서도 <모순>을 떠올렸으니,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 책에 빠져있다는 표현이 맞는 듯하다. 책을 덮고 처음 했던 생각은 "얼른 글로 정리하고 싶다."였고, 이어진 다음 생각은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였다. 이토록 덥석 겁이 났던 이유는, 정말 이 책 속의 이야기가 작가의 삶을 글로 녹인 것처럼 생생했기 때문에,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 힘들 만큼 어려운 질문들이 복잡하게 엉켜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보지 않고 이 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한 것을 정리할 수 있을까. 그만큼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나에게 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미루다 문득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우연히 책을 정리하다 표지 뒷면에 적힌 글귀를 읽었을 때였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무엇이든 망설이는 나에게 필요한 이 문장은, 기어코 나를 책상에 앉혔다.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해야만 말을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1998년 6월 27일.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 책의 초판이 인쇄된 날짜를 봤다. 8년 전, 도서관 서가를 정리하며 발견한 이 낡은 책을 그때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지금 나의 감상은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그 아쉬움을 뒤로하고 최대한 많은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담는 그릇을 빚는 것과 같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크게 그릇을 빚는 것이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이 글을 읽게 되었을 때, 보다 많은 생각들을 채울 수 있도록.


양귀자 <모순>

1.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나는 왜 영화를 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 그런 비범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이 질문을 되새기게 만드는 소설과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한번 책을 들춰보고, 다시 한번 영화 속 장면을 들여다보면서 계속 감탄한다. 멋진 문장과 미장센으로 표현된 장면들을 오랜 시간 눈에, 귀에 담기도 하고, 유려한 리듬과 디테일로 치밀하게 짜인 플롯을 되짚으며 예술가들의 장인 정신에 경외심을 느낄 때도 많다. 다만 위의 질문들을 던지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은 그것들을 품고 있는 이야기에서 나온다.

    나도 모르게 인물들의 감정에 대입하게 만들고, 그들 눈앞에 벌어질 상황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이야기. 비극인지 희극일지도 모를 이야기의 끝에서 '그러니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 그런 비범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책은 집요하게 물음에 대해서 답하기를 요구하며, 쉽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지금 삶을 응시하지 못하고 있다.'



2. 모든 것을 꿰뚫는 창, 모든 것을 막는 방패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여기에 모든 것을 꿰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가 있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이 물음에 상인이 차마 대답하지 못한 것은, 행동할 수 없어서이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찔러야만 답을 알 수 있지만, 행동할 수 없는 모순. 상인이 처한 바로 그 상황이 어쩌면 우리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책 말미의 '작가의 글'에서 언급되는 반대되는 관념들인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창과 방패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관념들이 '하나의 삶' 속에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모순, 그리고 그것이 인생에 양감을 불어넣어 주는 모순, 진진과 우리들의 이야기는 모두 이 모순에 관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 모순은 나의 인생이 단 한 번이기 때문에, 나의 인생은 오직 나만이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에게 주어졌던 선택의 순간들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누군가의 삶을 내가 이어받을 수 있다면 역사 속에 남은 현자들도 발견하지 못한 어떤 근원적인 이치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든 것이 선명하고 명쾌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삶 속에 놓인 우리는 모두 희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항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그런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장우를 보며 진진과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호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어줄 것만 같은 그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심지어 결국엔 떠나버리는 진진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답은 이모의 죽음에 있다.



3. 크리스탈 병과 라일락

나는 지금 무엇을 쫓고 있는가


 

   이모의 죽음 전, 진진에게 '동반자'란 내가 지고 있는 고통을 기꺼이 덜어줄 누군가, 구원자였을 것이다. 태어난 시간이 조금 빨랐다는 이유로 인생이 바뀌어버린 쌍둥이 자매를 바로 곁에서 목격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모의 편지를 읽고 나서야 진진은 반짝이는 모습 뒤에 가려졌던 공허한 삶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끔찍이 외로웠다는 사실도.


이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이모 같은 사람이 뿌리내리며 살기론 이 세상이 너무 얇았던 것이다.


    이모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진진은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모와 어머니 그리고 진진이 서로 오해했듯이, 생명의 유한함, 일회성과 유일성 때문에 결국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모가 진진의 선생님께 화분을 선물했을 때, 진진은 라일락이 담길 아름다운 크리스털 병을 바라봤다. 이모는 그 그릇에 담길 아름다운 라일락을 꿈꿨다.


    의 비참했던 인생과 솔직한 마음을 알게 된 진진은 자기 앞에 놓인 이 삶이 오롯이 나의 몫임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살아보지도, 살 수도 없는 시간들을 내가 살아내야 한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토록 메마른 내 인생을 어떻게 부풀려야 하는가.

    결국 그녀는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을 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 선택이 실수일 지도 모른다. 다만, 이 선택을 통해 내 삶은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 보다 선명한 삶에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것들을 품고 진진은 선택했다.

    그 삶을 응원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선택을 비판할 수 없었다. 나도 매번 그렇게 선택하지 않는가.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간달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누구나 살다 보면 원치 않은 일에 직면할 때가 있지.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뭘 해야 할지 결정할 수밖에 없어."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중에서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책 <모순>은 결국 선택당하는 선명한 삶의 비극을 한탄하며, 선택하는 희미한 삶을 응원하는 책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의 대답을 듣고 있다.

    

    언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가장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어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삶에서 과감하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것이 나를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지난날,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보다는 머뭇거리는 사이에 지나쳐버린 기회들이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바람에 때때로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핑계들은 항상 있었고, 그런 태도 덕분에 물질적인, 사회적인 이득을 볼 때도 있었다. 다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책임지기 싫어 회피하는 태도는 내 삶을 더 메마르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부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질했던 날들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보다는 차라리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보려 한다. 그것이 내 인생에 양감을 불어넣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살아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사랑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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