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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seong Lee Mar 30. 2024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 1

2024년 2월 회고록

2024년 2월 28일의 일기

눈길에서의 운전 실수로 렌터카 1대를 전손 처리했다.


   끔찍했던 한 달간의 긴 유럽 출장을 마치고,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파리 공항으로 출발했다. 출국 시간 4시간 전, 예약한 패딩을 받으러 들린 매장에 직원이 나타나질 않았다. 발을 동동 굴리며 애타게 찾았던 그 직원은 옆 매장에서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예약한 물건을 한참 찾는 것도 모자라서 카드 결제 실수까지 해준 직원 덕분에 1시간이 넘게 지체되었고, 우리는 Boarding time 40분 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출국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평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한산했던 보안 검색대를 쉽게 통과했다.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자리 동료에게 농담을 건넸다.

 "이렇게 개고생 하고 항공편 지연되면 오늘 억울해서 잠 못 잡니다."

 "오히려 좋지. 시차 적응하려면 자면 안 돼"

    이 말도 안 되는 대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부두술 때문이었을까. 소란해진 공기에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가 탈 항공편명 옆에는 어느새 'Delayed'라는 글자가 선명히 박혀있었다. 2시간 지연, 사유는 '기체 결함'이었다. 그리고 '지연'에서 '결항'으로 바뀌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우리는 체크인 카운터로 달려가야 했다.



    카운터에 도착한 지 어느덧 2시간, 샤를 드 골 공항 대한항공 직원들의 대처는 매끄럽지 못했다. 상황도 그만큼 좋지 못했다. 직항은 최소 이틀 뒤에야 있었고, 주말인지라 승객들이 묵을 호텔 어레인지도 쉽지 않아 보였다. 악운이 겹친 흔치 않은 상황에 직원들은 허둥댔고, 그 모습에 사람들은 더 불안해했다. 한계에 다다른 승객들의 인내심이 출국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고 가는 고성 속에 멀뚱히 서있다가, 4시간 만에 드디어 대체 항공편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를 9시간 경유하는 항공편이었다.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직원에게 경유 시간이 더 짧은 항공편은 없냐고 물었다. 2~3시간 경유하는 항공편을 원한다고 했다. 일도, 영어도 서툰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려 경유 시간 45분짜리 항공편을 추천해 주었다. '나 잘했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답답한 내 마음만큼이나 늘어진 줄을 보고는 그냥 9시간 경유하는 항공편을 받아서 숙소로 갔다. 숙소 체크인 중에 알게 된 절망적인 사실은 우리 바로 뒤에 서 있던 신혼부부가 3시간 경유 항공편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지. 차라리 그 자식 컴퓨터를 뺏어서 내가 예매할 걸 이라는 생각을 했다. 같은 날 나를 괴롭게 했던 몽클레어 직원이 떠올랐다. 화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동료에게 말했다. "프랑스인들과는 일적으로 엮이면 안 되겠다." 사실은 좀 더 상스럽게 표현했던 것 같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3시간 몸을 뉘이고(잠을 잤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9시간의 경유 지옥이 시작되었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내 캐리어 바퀴 하나가 부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숨과 함께 욕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내 동료는 처음 보는 내 모습에, 혹은 내 진짜 모습에 놀랐는지 흠칫했고, 나는 '나 화났으니까 건들지 마'라는 느낌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는지, 아니면 길게 쌓인 피로에 제대로 눌려버렸는지 아버지뻘 동료는 그 피로를 나에게 온갖 짜증으로 풀기 시작했다. 나는 대꾸 없이 한숨만 쉬며 무시했다. 속으로 욕도 했다.

    경유시간이 절반 정도 지났을 때에는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억울함, 샤를 드골 공항 직원(어쩌면 프랑스인)에 대한 분노, 그리고 얼른 귀국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침묵으로 시위하기 시작했다. 동료의 물음에도 단답으로 대답했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있는 직원들이 건네는 인사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Do you have a problem?'이라는 걱정 섞인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도 젓지 않았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유치함이지만 당시의 나는 비장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난처해하는 그 표정을 보면서 통쾌해했던 것 같다. 대상이 틀리긴 했지만.

    비행기 탑승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안도감과 함께 거짓말처럼 화가 누그러졌다. 그리고는 지질하게도 순식간에 분노의 자리에 후회의 감정이 자리 잡았다. 아무 죄도 없이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야만 했던 직원들, 동료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행동들이 반복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가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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