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따라 죽음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가혹한 질문 하나가 내 삶을 덮쳤다. “마흔다섯의 죽음과 일흔다섯의 죽음 중, 더 슬픈 쪽은?”
이 질문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나의 죄책감이기도 하고, 세상을 향한 비겁한 항변이기도 하다. 2년 전, 나는 한국무용을 전공했던 찬란하게 아름다운 나의 언니를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담도암으로 보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일흔다섯이 된 나의 엄마를 모시고 다시 암 병동을 지키고 있다.
언니가 떠나던 날, 우리 가족의 세상은 무너졌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마흔다섯은 죽기엔 너무나 억울한 나이였고, 세 아이의 엄마이자 동생들의 학자금을 보태주던 든든한 맏딸을 잃은 슬픔은 그 어떤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감히 생각했다. "만약 언니가 조금만 더 나이가 들었더라면, 삶을 충분히 누리고 난 뒤였더라면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2년 뒤, 일흔다섯의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죽음 앞에 '괜찮은 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흔다섯의 엄마 역시 여전히 살고 싶어 하고, 여전히 딸의 안부를 걱정하며,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는 한 명의 '여자'이자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무리하게 항암치료를 감행해야 할까?." 그 속에 숨겨진 잔인한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저린다. 누군가에게는 '남은 여생'일 뿐인 엄마의 시간이, 본인에게는 간절한 '단 하나뿐인 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너무 일찍 나비가 되어 떠난 나의 언니와, 이제 그 나비를 따라가려는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는 한 워킹맘의 기록이다. 동시에 죽음이라는 공평하고도 불공평한 운명 앞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보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절박한 고찰이기도 하다.
언니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던 아버지의 등 뒤에서, 그리고 신약의 비용과 언니의 남은 생의 길이를 저울질해야 했던 형부의 괴로운 선택에서 보았다. 삶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그 끝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시리고 아프다는 것을.
이제 나는 언니가 못다 춘 춤을, 그리고 엄마가 붙잡고 있는 희미한 숨의 기록을 이곳에 담으려 한다.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곁에 있는 부모님의 손을 한 번 더 잡게 하는 이유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