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꽃을 꺾어 병(甁)에 꽂다

면사포를 쓰고 받아든 졸업장

by 기억하는 나비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무대 체질이었다. 어려서부터 끼가 남달랐던 언니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진심으로 즐겼다. 수줍어 하기는커녕 타인의 시선 속에서 더 활짝 피어나던 아이였다. 언니는 환한 조명 아래서 날개를 펼친 듯 찬란하게 날아올랐다. 그 몸짓은 중력을 이겨내고 자유를 갈구하는 한 마리의 나비 같았다. 그런 언니가 한국무용을 전공으로 택한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얀 동정 깃 아래로 곱게 빗어 넘긴 쪽머리. 무대 위에서 화사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사뿐히 발을 딛는 언니의 모습은 영락없는 선녀 같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도약 뒤에 숨겨진 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서울소재 대학교의 무용과는 부잣집 아이들의 모임터 같았다. 동기들은 비싼 옷과 화장품,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가방을 들고 다녔다. 부유한 집 아이들의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복도를 채울 때, 언니는 움츠러든 어깨를 감추며 무용연습실을 빠져나왔다.


예쁜 얼굴과 타고난 끼로 방송국 단역에도 도전해 보았다. 주인공 뒤에 서 있는 이름 없는 역할이었지만, 언니는 그 짧은 순간에도 무대 위의 공기를 마시는 것을 위안 삼았다. 그러나 카메라 조명은 늘 주인공만을 비추었고, 언니는 빛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청춘이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지칠 대로 지친 언니 앞에 형부가 나타났다. 나이 차이가 꽤 났던 그는 부유한 집안 배경에도 불구하고 나무처럼 단단하고 반듯했다. 언니의 화려한 춤사위보다 그 뒤에 숨겨진 고단함을 먼저 봐준 그의 다정함은, 거친 풍랑 속에 떠 있던 언니에게 나타난 단단한 섬 같았다.


결국 언니는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의 가을에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누군가는 사랑이라 했고 누군가는 가난으로부터의 도피라 했지만, 남들 앞에 서기 좋아하던 화려한 소녀가 선택한 것은 의외로 고요한 '가정'이라는 안식처였다. 그러나 안식처라 믿었던 시댁의 문턱을 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가혹한 현실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시집살이는 스물한 살 여대생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고단했다. 학교에 가기 전 시어머니 수발을 드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대 위 버선발은 이제 거실 바닥을 닦느라 쉴 틈이 없었고, 시누이 자녀들의 준비물까지 챙겨야 했다. 아이들의 학교 등 하원까지 도맡으며 틈틈이 강의실로 달려가는 언니의 일상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질주였다.


남들 앞에 서서 박수받기를 좋아하던 그 많던 끼는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대학 생활의 청춘을 마음껏 즐기기 전에 앞치마를 둘러야 했던 그 살얼음판 같은 시집살이를 견디고 언니는 기어이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그것은 한 여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그 모진 시집살이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친 눈물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언니의 삶은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시댁의 엄한 눈치 속에서도 언니는 늘 친정 식구들을 먼저 생각했다. 아끼고 모은 돈은 시댁 몰래 친정집 대문을 넘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생하는 동생들의 학비가 행여 모자랄까 봐, 언니는 시댁에서 받은 본인의 자존심과 맞바꾼 푼돈을 털어 봉투를 만들었다.


동생들에게 틈틈이 용돈을 주던 언니의 멋짐 뒤에는, 자신의 상실감을 꾹꾹 눌러 담은 인내가 숨어 있었다. 언니에게 결혼은 도망치고 싶었던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을 담보로 제공한 새로운 형태의 헌신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첫째가 찾아왔고, 뒤이어 둘째와 셋째가 태어났다. 무대 위에서 가볍게 날아오르던 근육들은 세 아이를 품고 시댁의 무게를 견디며, 동시에 친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한 인내의 근육으로 바뀌어야 했다. 무용수가 아닌 '삼 남매의 엄마'이자 '시댁의 일손', 그리고 '친정의 맏딸'이 된 언니. 그것은 화려한 주인공을 지워내고 모두의 배경이 되어주는 길고도 정적인 살풀이춤의 시작이었다.


그 춤이 멈추던 날, 언니를 차가운 흙 아래 묻으며 아버지는 무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오열했다. 한 번도 남 탓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언니의 무덤을 붙잡고 피 토하듯 내뱉은 말은 지금도 내 가슴에 박혀 있다.


“미안하다... 다 아빠 때문이다. 무능한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간 거야.”


그것은 딸의 끼를 꺾어 일찍 시집보낸 가난한 아비의 통한이었고, 동생들의 학비 봉투를 건네던 딸의 손목을 차마 잡지 못했던 미안함이었다. 언니가 지키려 했던 가족의 평온은, 사실 언니라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병에 꽂아둔 채 얻어낸 위태로운 평화였음을 아버지는 그제야 고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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