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보고 싶은 언니
언니의 투병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전쟁이었다. 화려한 한국무용의 곡선을 그리던 몸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를 즐기던 밝은 안색은 암세포가 앗아간 황달로 검게 변해갔다.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졌던 형부였지만,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의 돈은 생각보다 힘이 없었다.
언니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약을 찾았다. 1회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신약. 그 약은 언니를 다시 무대 위로 돌려보내 주는 마법의 약은 아니었다. 그저 고통 속에 있는 언니의 숨을 몇 달 더 붙잡아두는 '생명 연장'의 대가치고는 잔인한 금액의 항암제였다. 언니에게도 신약을 찾았노라고 얘기했다.
“나 조금 더 살자고 우리 애들 가난하게 만들 수는 없어.”
가난이 싫어 결혼을 선택했던 언니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완치될 수 없는 병 앞에서 부부는 무력했다. 결국 기계의 힘으로 가느다란 숨을 이어가던 언니를 앞에 두고, 형부는 떨리는 손으로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고통에서 놓아주는 마지막 자비이자, 남겨진 자가 평생 짊어져야 할 가혹한 형벌이었다. 언니의 숨이 멈추고 하얀 천이 야윈 얼굴을 덮던 날, 형부는 언니의 차가운 손을 붙잡고 무너지듯 속삭였다.
"미안해. 내가 너를 놓은 거야. “
그 말은 단순히 병원에서의 마지막 선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나는 안다.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던 형부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문의 질서를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언니가 고단한 시집살이와 조카들의 뒷바라지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갈 때도, 형부는 단 한 번도 언니의 편에 서서 집안 어른들에게 맞서지 못했다. 사랑한다면서도 언니를 홀로 외롭게 두었던 그 방관의 시간들이, 결국 차가운 서명지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언니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추석 명절에 형부와 친정 식구들이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도심 상가 한복판에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나비 한 마리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비는 형부와 나의 주위를 떠나지 않고 한참 동안 천천히 맴돌았다.
무대 위에서 나비처럼 춤을 추던 언니였다. 버선발로 사뿐사뿐 세상을 딛던 언니가, 이제야 무거운 육신과 숨 막히는 역할들을 벗어던지고 가장 가벼운 날개를 달아 우리를 보러 온 것만 같았다. “나 이제 정말 괜찮아,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라고 말하듯 나비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우리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아버지는 가난해서 딸을 일찍 보냈다고 울었고, 남편인 형부는 자신의 방관과 선택으로 아내를 놓았다고 울었다. 하지만 언니는 나비가 되어 돌아와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추어왔던 그 고단한 살풀이춤을 끝내고 이제야 비로소 자유로운 날갯짓을 시작했노라고.
한 여자의 생은 그렇게 두 남자의 지독한 미안함과,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나비 한 마리의 신비로운 인사 사이에서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