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을 두 번 음미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 순간에 한 번, 돌아보며 또 한 번.' 소설가이자 일기 작가인 아나이스 닌(Anaïs Nin)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논문을 쓴 경험에 대해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한 경험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로 한다. 일종의 자기 위로 행위랄까. 피, 땀, 눈물, 돈, 시간, 체력 등등등을 몽땅 때려 넣어 아무도 읽지 않을(혹은 읽어서는 안 될) 석사 논문을 쓴 다는건, 구르프와 드라이로 정성스레 뽕을 살린 내 머리 같이, 나 아니면 쏟은 그 정성을 아무도 모를 그런 일이다. 이렇게 나라도 되새김질하고 곱씹으며 정성스레 의미부여를 해줘야 하는 이유다.
우선,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발적 중노동을 선택한 이유. 살면서 단 한번쯤은 지식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어보고 싶었다. 역시 생산보다는 소비가 좋다. 앞으로는 그냥 소비 요정으로 살래.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여기 계신 이 아주머니도 저기 계신 아주머니도 그저 위대해 보였다. 이 모든 걸 다 해내신 분들이라고? 이젠 이 석사 나부랭이도 저 석사 나부랭이도 그저 위대해 보인다. 이 짓을 다 해내신 분들이라고!
논문을 읽으며 구멍이 아닌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처철하게 벌였을 저자의 분투를 읽는다. 각자 말 못 할 오만가지의 사정을 안고 자신을 끝까지 밀어 붙였을 그들의 서사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구멍을 메우지 못하고 출간하며 느꼈을 무력함이 보인다.
이쯤해서, 아무도 궁금하지 않다는 거 알지만 수요 없는 강제 공급을 좀 해야한다. 내 논문 칭찬 좀 받았다. 당연히 내가 잘 써냈기 때문이 아니다. 지도 교수님과 선배들이 한 장 한 장 깔아 놓은 견고한 주춧돌에 벽돌 몇개 더 올리는 수고를 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서 해냈다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믿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걱정한다. 내 논문이 가뜩이나 소란스런 세상에 잡음 하나를 더 얹은 것은 아닐까. 논문을 작성하며 소모된 전기와 발생된 이산화탄소를 상쇄할 가치 정도는 있는 걸까. 제본을 위해 희생된 나무들에게 미안하지 않아도 될만큼은 쓰이게 될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결국에 117,302개의 글자를 144쪽에 담아냈다. 이 과정에서 가다가 중지곳 하지않는 법을, 납작해진 엉덩이로, 말라버린 두 안구로, 시큰 거리는 손목으로, 솟아오른 승모근으로, 깊어진 미간 주름으로 배웠다. 온 몸에 새겨진 이 머슬 메모리들은 남은 날들을 헤쳐나가는데 꽤나 유용한 자산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