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쓸 일도 없는 여권 만들기
지난주 구청에 가서 여권발급 신청을 했다.
2020년에 유효기한이 만료되었으니 5년 만에 다시 여권을 갖게 된 셈이다.
남편의 해외출장이 결정되어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했는데 그는 이번기회에 내 것도 함께 만들자고 했다.
해외로 나갈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필요도 없는데 귀찮게 나까지 만들어야 하냐며
싫다고 했지만, 웬일인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5년 안에 비행기 타게 해 줄게!!"라고 꼬드기는 바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같이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 사람 성격으로 보아 관공서를 방문해서 이런저런 일처리를 혼자 하기 싫어서 좀 더 꼼꼼한 나를
끌어들였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만, 빈말이라도 해외 여행시켜 준다고 약속하는 게 고맙기도 했다.
쓸 일도 없었지만 솔직히 여권을 만드는 것 자체보다는 증명사진을 찍는 일이 싫어서 미루어 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사진이, 그것도 증명사진이 마음에 꼭 들게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딸도 얼마 전 생애최초의 신분증에 사용할 사진 촬영할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한 끝에 잘 찍는다고
소문난 스튜디오에 예약까지 해가면서 찍어올 정도였으니,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의 사진이 들어가는
증명서라도 만들라치면 좀 더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 신경 쓸 수밖에 없나 보다.
내 사진이 잘 나오는 것에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남들에게 예쁘게 나온 사진을 보이고 싶어서일까?
남들은 내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예쁘게 나왔는지, 머리가 지저분한지, 얼굴이 넓적하게 나왔는지,
홀쭉하게 나왔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누구나 지금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사실 '자신의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남의 사진은 그냥 한번 쓱- 보고 말 테니까 내가 남들을 의식만 안 한다면 사진이 잘 나오든 못 나오든
별로 큰일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내가 ‘내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어색한 것이 문제다.
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이렇게 어색한 걸까?
예전에는 쇼핑 나가서도 고른 옷을 입어보고 매장에 있는 거울을 직원과 함께 보며 사이즈 체크하는 것이 너무 어색해서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곤 했다.
옷을 사러 갔으면 내 모습을 찬찬이 뜯어봐야 하는데 그걸 못해서 옷을 대충 고르거나 허탕 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잘 고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다고 느끼겠지만 사실이다.
다행히 지금은 ‘나를 똑바로 보는 일‘이 많아졌지만 거울 속의 내 모습이든, 사진 속의 내 모습이든
자연스럽게 바라본다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오랜만에 여권을 만들면서 알게 된 것은 여권 사진을 찍을 때는 무표정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공공기관에서 발급하는 증명서에 들어가는 사진이 예쁘게 나와서 나쁠 건
없겠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사진은 웃으면 안 된다잖아.
무표정이 기본이라는 지침사항에 더 기뻐했다. 사진 찍을 때 무표정한 게 내 특기니까 말이다.
누구보다도 여권사진을 정석으로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자연스럽고 웃는 얼굴은 포기해도 된다.
누가 봐도 예쁘게 나온다면야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00%의 나를 증명하는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만 담으면 된다.
그러고 보면 예쁘게 꾸미고 좋은 이미지를 위해 살짝 미소도 지어야 하는 <이력서용> 사진보다는
담백하게 생긴 대로 찍는 <여권 사진> 찍기가 내 적성에 더 잘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를 좀 더 예쁘게 만들려는 노력도 없이 너무 순식간에 모든 게 끝나 버렸고,
나만큼이나 무뚝뚝한 촬영기사님은 쿨하게 촬영을 끝마쳤다.
사진 찍기 전에 머리라도 만져볼까 해서 챙겨간 헤어크림과 립스틱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여권사진은 이렇게 찍는 거구나. 예전에도 이랬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어서 미처 몰랐나 보다.
활짝 웃은 사진으로 여권신청을 하다가 사진이 거부당하는 것보다 매뉴얼대로 해서 재촬영 없이
한 번에 끝내는 편이 나을 테지.
아마도 이 사진을 다른 용도로는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나저나 사진들을 보다가 내 사진이 나오면 재빨리 넘겨버리는 것은 언제쯤 안 하게 될까?
일주일이 지난 오늘 여권을 찾아왔다.
달라진 시대만큼이나 색깔과 만듦새도 많이 바뀌었고, 요즘 여권이 이렇게 예쁘게 바뀐 걸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군소리 없이 따라나섰을 거라고 남편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내 생활패턴으로 봐서는 자주 쓸 일도 없는 여권인데 예쁘다고 이렇게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최첨단의 전자칩과 대한민국을 표현하는 다양한 전통문양들이 들어있는 이 작은 증명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국뽕이 차올랐다.
장롱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써오기를 10년째, 예쁜 신분증 하나가 또 생겼다.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깨끗하고 소중히 사용하려면 보호커버는 필수니까 적당한 여권커버를
주문해 놓고 기다린다.
당장은 필요 없더라도, 해외 나갈 일이 언제가 됐든 그때에 기분 좋게 꺼내 쓰려면 잘 보관해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