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지? 이리로 앉아, 물 한잔 먹어."
지금도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맞아주셨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하면,
시원한 물 한 잔과 함께 에어컨 바람 잘 나오는 자리로 안내해 주셨다.
그 집에 가면 왜인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른 어르신들 댁에서는 긴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는데,
할머니 집에서는 정말 편했다.
"나는 자식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아. 내가 건강한 게 자식들한테 피해 안 주는 거야."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정말 부지런히 건강을 관리하셨다.
아침마다 혈압, 혈당 체크하시고, 꼼꼼히 수첩에 기록하셨다.
"오늘은 혈압이 좀 높네? 짜게 먹었나?"
자가 진단까지 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할머니 댁에 갔을 때였다.
"간호사님, 나 요즘 검은 변을 봐요. 한 며칠 됐고 어지러워."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검은 변이라니. 위장출혈이 의심됐다.
"할머니, 지금 당장 병원 가야 해요."
"에이,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
"안 돼요. 지금 가야 해요. 제가 같이 갈게요."
거의 떼쓰다시피 해서 119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셨다.
"계속 너한테 신세만 지네... 미안해." 응급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긴 병에 효자가 없어. 다들 힘들어서 그렇지, 아들이랑 딸이 나쁜 애들은 아니야."
할머니는 자식들을 원망하지 않으셨다
. 오히려 이해하고 계셨다.
고관절 수술을 7번이나 받으면서 쌓인 병원비, 그걸 감당하느라 지쳐버린 자식들.
"할머니, 제가 지금 같이 있잖아요. 어때요, 든든하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할머니가 깔깔 웃으셨다. "하하하, 덕분에 웃는다."
몇 개월 후,
만삭이었던 나는 다른 어르신 댁을 방문 중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어르신이 돌아가신 것 같아요."
만삭인 몸으로 뛰어갔다.
배가 당기는 것도 잊고 그냥 뛰었다.
제발, 제발 아니기를...
할머니 집 문 앞에 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거실에 쓰러져 계셨다. 얼굴이 찡그려져 있었다.
고통스러웠구나. 혼자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배 속의 아기가 발로 차는 것도 느껴졌다.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 한 생명은 떠나가고...
할머니는 끝까지 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건강을 관리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꿋꿋이 버티셨다.
"긴 병에 효자가 없어." 이 말씀을 하실 때 할머니 눈가에 눈물이 고였던 게 기억난다.
원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만삭의 몸으로 할머니를 발견했을 때, 나는 마음이 아팠다.
새 생명을 품고 있으면서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
그 아이러니함. 배 속의 아기가 발로 차면서
'엄마,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찡그린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혼자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그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 간절함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분은 '살고 싶었다.
' 그 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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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메시지 999》는
고독사와 가정 내 임종을 둘러싼
작은 신호들과 놓쳐버린 이야기들을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간호사이자 사회복지사로 15년을 살아오며,
삶의 마지막 곁을 지키려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일상 속 이야기와 활동 후기는 블로그에서 함께 나누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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