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나를 속였어!"
이 한 마디가 지금도 가슴에 박혀 있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조현병이 있었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으셨다.
그래도 나름대로 잘 지내고 계셨다.
집은... 처음 갔을 때 정말 충격이었다.
쓰레기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고,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만 나 있었다.
그 끝에 할머니가 누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계셨다.
어느 날, 이웃과 싸우다가 넘어지셨다.
허리를 심하게 다치셨다.
병원에서는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때 할머니가 나를 찾으셨다.
직접 전화를 하셨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 좀 도와줘. 너무 아파." 마음이 좋지 않았다.
평소에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분이었는데.
집에 찾아갔을 때, 할머니가 처음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옆집에 보니까 도우미도 오고 그러던데, 나도 신청해줘."
깜짝 놀랐다. 정말 깜짝 놀랐다.
집에 낯선 사람 오는 걸 그렇게 싫어하시던 분이...
"허리 수술도 받고 싶어. 너무 아파." 진짜로 아프신가 보다.
나는 뭔가 뿌듯했다.
드디어 할머니가 마음을 여셨구나.
나를 믿어주시는구나. "할머니, 제가 다 도와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준비했다.
장기요양등급 신청, 재택의료 연결... 할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가정으로 방문하는 의사선생님이 있어요. 통증도 관리해 주실 거예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믿어주시는 것 같아서 더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런데... 공단 직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당황스러웠다.
"할머니가 이거 직접 신청한 거 맞아요? 아예 집에도 못 들어오게 하는데!"
뭐라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재택의료 의사 선생님도 전화를 주셨다.
"환자분이 '김정은이 나를 속였어! 날 강제입원 시키려 했어!'라고 하시는데요...
"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 내가 뭘 놓친 거지? 강제입원. 할머니에게는 트라우마였다.
그걸 내가 놓쳤다.
의사가 집에 온다고 하니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신 거다.
동행했어야 했다. 설명했어야 했다. 천천히 했어야 했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나를 완전히 차단하셨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집에 가도 문을 안 열어주셨다.
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다른 직원이 사례관리를 맡게 됐지만, 나는 계속 할머니가 신경 쓰였다.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었다.
식사배달 담당자한테 부탁했다. "혹시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 연락주세요."
요구르트 배달하시는 분한테도 부탁했다.
"문제 생기면 저한테 바로 연락주세요."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였다.
다른 어르신 댁을 방문 중이었는데 전화가 왔다.
"선생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아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신입 직원이 식사배달 갔다가 발견했어요."
상담 중이던 어르신께 급히 양해를 구하고 뛰어나갔다.
미친 듯이 뛰었다. 제발, 제발... 119 구급대원들과 동시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저는 어르신 담당 사례관리사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손이 계속 떨렸다.
그날 밤,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사례회의 시간에 할머니 이름만 나와도 눈물이 터졌다. 동료들이 당황했다.
"왜 그래?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할머니와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을 텐데.
며칠 후, 지방에서 딸이 복지관으로 찾아왔다.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간호사님 계시나요?" 나를 찾는다고 했다.
상담실에서 마주 앉았다.
딸이 먼저 울기 시작했다.
"너무 감사드려요. 우리 엄마는 저도 모시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동안 어머니를 케어 해주셔서 감사해요."
음료수 한 박스를 내밀었다.
그 순간, 나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제가 더 잘해드리고 싶었는데요... 제가 실수해서 할머니가 저를 거부하셨어요... 죄송해요..."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상담실에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됐던 적이 있어요.
그때 트라우마가 심하셨어요.
그래서 그러신 거예요. 간호사님 잘못이 아니에요."
딸의 위로에 더 울음이 터졌다.
나는 할머니를 돕고 싶었다.
진심으로.
할머니가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나는 들떠 있었다.
드디어 할머니가 마음을 여셨다고, 이제 제대로 도와드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들뜬 마음이 화를 불렀다.
강제입원의 트라우마.
의료진에 대한 공포.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의 폭력. 이 모든 것을 나는 놓쳤다.
아니, 알면서도 간과했다.
'이번엔 다르잖아. 도움을 주려는 거잖아.' 내 멋대로 판단했다.
할머니에게 그 '도움'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돌봄이란 무엇일까.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로,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조심조심 다가가는 것.
그것이 진짜 돌봄이다.
민감함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상대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나의 영혼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더 민감해져야 한다.
아주 조금만 더 민감했더라면... 이 후회를 품고 산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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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메시지 999》는
고독사와 가정 내 임종을 둘러싼
작은 신호들과 놓쳐버린 이야기들을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간호사이자 사회복지사로 15년을 살아오며,
삶의 마지막 곁을 지키려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일상 속 이야기와 활동 후기는 블로그에서 함께 나누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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