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교환학생 수요 끄적끄적
1. 센치해진 밤. 추억을 회상하기 좋은 시간
토요일 밤. 오랜만에,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는 나로선 항상 다른 사람을 곁에 두고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친구가 오늘 콘서트를 보러 파리로 떠남에 따라 나만의 시간을 만끽하게 된 것.
평소 둘이었던 공간 속에서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찰리 푸스의 'One Call Away'를 틀어놓고 즐거운 샤워를 하고 개운한 상태로 나온 나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남색빛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새 겨울이 왔는지 찬바람이 들이차자 바로 창문을 닫는다. 센치해진 나는 곧바로 난 노트북 앞에 앉는다.
그리고, 교환생활을 시작하기 전, 나의 평생 소울메이트라 불릴 만한 친구, 정빈이와 떠났던 열흘 간의 여행을 희미해질 뻔한 기억들을 꺼내가며 되짚어간다.
2.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자연을 보여준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사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국가들이 널려 있는 유럽 대륙에서, 생소한 편에 속하는 국가다. 나도, 정빈이와 함께 이번 여행을 기획하기 전까지는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동굴인 포스토이나 동굴로 대표되는 자연과, 한여름의 강렬한 태양빛만큼이나 따뜻했던 슬로베니아 사람들의 친절함에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다.
1) 포스토이나 동굴
어렸을 때부터 나는 만화책을 좋아했었고, 그중에서도 여러 가지 일반 상식을 알려준 <Why?> 시리즈를 유독 사랑했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시리즈 중 '동굴'편은 아직도 그 주인공이 기억날 만큼 인상 깊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동굴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나였기에, 이번 슬로베니아에서 포스토이나 동굴이 전해주는 느낌이 사뭇 남달랐다. 중국에 있는 동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동굴이라고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
그리고, 포스토이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탈 것이 등장한다. 무슨 말이냐고? 그러니깐 동굴이 워낙 깊고 넓어서, 도저히 인간의 걸음으로는 동굴의 가장 핵심부까지 반나절 안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동굴 안으로 향하는 기차에 타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동굴의 으스스한 찬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20여분을 달리면 인간에게 공개된 동굴의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등장한다.
"와"
입 밖으로 경탄이 가장 먼저 튀어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순백의 석주는 마치 화이트 초콜릿 폭포를 얼려놓은 것만 같은 비주얼이었고, 각종 석순과 종유석들은 각자의 크기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서만 봤던 동굴의 다양한 지형들이, 눈앞에 펼쳐진 것. 때로는 웅장한 커튼과 석탑의 모습으로, 때로는 맛있는 스파게티 면과 같은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에, 새삼 석회암이라는 암석의 위대함이 가슴속에 웅장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도인 류블랴나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우연히 앉은 버스의 옆자리에는 아리따운 내 또래의 슬로베니아 여성 분이 타고 있었는데, K-pop을 사랑하는 친구였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며 가고 있던 그녀는 슬로베니아 어머니와 크로아티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덕분에 두 국가를 여행할 때 그 장소에 대한 꿀팁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버스에 내려서까지도 세심하게 앞날을 축복해 주는 그녀의 모습은, 따뜻한 슬로베니아 사람들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2) 블레드 호수
포스토이나 동굴과 함께,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블레드 호수이다. 평화롭고 잔잔한 물,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 유명한 이곳으로 오기까지는 절대 쉽지만은 않았는데, 우리는 시간표를 지키지 않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는 여정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호숫가의 식당에서 해산물 리조또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바닷가도 아닌 호숫가였지만, 이 부근 식당들은 모두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는 게 굉장히 독특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내내 우리의 시선은 세상 푸른 기운이 느껴지는 호숫가 쪽으로 향해 있었다.
배를 든든히 한 후에는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나룻배를 타는 나루터로 향했다. 100% 사람의 힘으로만 이동하는 나무로 된 이 나룻배는, 우리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건장해 보이는 직원의 힘찬 노질과 함께, 뜨거운 태양빛과 넓은 물길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는 내내 우리를 둘러싼 이 푸른 호수와 산맥은 너무 아름다웠고, 성처럼 생긴 조그마한 성당의 모습이 돋보이는 섬으로 향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물론, 섬에 도착하고 나서 보았던 성당의 영험한 분위기, 그리고 자연과 어울려 있는 아름다움도 즐기긴 했지만 나룻배 위에서 오고 가며 보았던 섬과 호수의 조화가 특히 압권이었다.
만약, 이곳에 갈 예정인 사람이 있다면, 꼭 겨울에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우리가 보았던 그 시야 속의 장면에 하얀 눈이 살짝 겹쳐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상상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3. 사람들의 따뜻함으로 온기 가득했던 슬로베니아
수도인 류블랴나 시내를 구경하기로 한 날 저녁, 그전부터 강행군으로 인해 내 친구 정빈이는 몸져누웠다. 그렇게 체력관리의 중요성을 설파했건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채 무리해서 놀다가 결정적인 순간 쓰러져버린 그가 밉기도 했지만, 약을 먹이고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며 기다려주었다.
밖에서 오랜만에 태블릿으로 학교 관련 메일들을 처리했고, 호스텔 로비를 어슬렁거리다가 미리 샤워를 했다. 돌아오니, 다행히도 몇 시간의 취침 끝에 정빈이가 깨어났고 우리는 류블랴나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한적하게 이어진 거리를 걷다 보니, 과연 우리가 원하는 느낌의 시내가 나올까 하는 의구심이 들려던 찰나였다.
"댕 댕 댕 댕 댕"
저녁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내뿜는 성당의 모습을 시작으로, 우리가 그리던 아름다운 동유럽 국가의 전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곳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선 식당의 테라스에서 운하를 끼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건물들의 색깔을 조화로웠고, 적당한 밀도의 군중들은 정겨웠다.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 들어온 맛있는 음식의 냄새는, 우리의 배꼽시계를 더욱 재촉했다.
우리가 선택한 식당은 높은 평점을 자랑하는 햄버거집이었다. 그렇다고 햄버거만 파는 집은 아니었고, 피시 앤 칩스나 다양한 닭튀김 요리 등도 선보이는 곳이었다.
원래 저녁시간에는 웨이팅이 긴 곳이었으나, 우리 앞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른 식당으로 가버리는 행운 속에서 우리는 늦지 않게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주변을 적당히 둘러보며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보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우리는 바비큐 소스가 들어간 시그니처 버거와 피시 앤 칩스를 주문했다. 아, 물론 생맥주 두 잔을 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친절한 직원은 너무 늦지 않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 맛은, 표현이 필요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기름진 음식에 시원한 생맥의 조화는 나의 정신으로 천상으로 이끌어주는 듯했다. 때마침 들려오는 거리의 음악 소리는 아름다웠고, 바람은 적당히 조화로웠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식사는 어둠이 짙게 깔리고 우리의 수다가 종료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열흘 간의 모든 식사를 통틀어 이 날의 저녁 식사가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다. 아마도 적절히 살랑거렸던 바람과 너무 바삭하고 고소했던 식사, 그리고 고생하고 먹었던 우리의 상황 등 삼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잘 회복하여 아름다움을 함께 맛볼 수 있었던 이유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
함께라서 더욱 좋았던 슬로베니아는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