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중고등학교에서 해방 전후 시인으로 배웠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대표적인 시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굉장히 뛰어난 시인이었다고 배웠던 기억만 나는 거다. 김수영 디 에센셜이라고 이름된 책은 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수영 시인의 시집 한 편만 재발간 하는 형태가 아닌 그의 대표작을 모아서 새롭게 낸 책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시 뿐 아니라 그의 산문, 일기, 그리고 미완성된 소설까지 다양한 김수영을 살펴볼 수 있었다.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어가다 보면 만들어진 시라는 느낌이 아니라, 삶이 시 속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해방 전후에 쓴 그의 시가 벌써 50년 넘게 흐른 지금에도 크게 낯설거나 어렵지 않고 무게감 있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김수영은 소시민의 일상을 통해 비겁한 자신을 직책하는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서기 위해 이를 악무는 시인이었습니다. 정신적 나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전선을 확인하는 냉철함이나 그러한 냉철함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을 일상적 소재에서 발견해 내는 독창적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편집자의 이런 소개가 딱 맞게 느껴졌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의 대표시인 풀을 읽으면서 문득 바람에 뽑히거나 없어지지 않고 바람에 의해 아무리 흔들려도 누웠다가 일어나는 풀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무엇에 홀린 사람 모양으로 이 목적 없는 글을 쓰고 있다.
이 무서운 고독의 절정 위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겠나?
자네의 모습이며 림 양의 모습이며 B양의 모습이 연황색 혹은 연옥색 대리석으로 조각을 해 놓은 것처럼 신선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워 보인다.
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에게 느끼는 아름다운 냄새를 나는 어떻게 처리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환멸과 절망을 느낄수록 사람이 더 그리워지고 끊임없는 열렬한 애정이 솟아오르기만 하는 것이 이상하다.
책에 표시해 둔 많은 문장들을 옮겨 쓰려다 보니, 앞 뒤 내용과 떨어지면 크게 와 닿는 문장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오래전 고전들이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작품으로 오래도록 남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인정되는 그들의 뛰어난 글, 그 속에 깃들여 있는 무언가가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사람들에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들을 하나씩 읽으면서 문득 멈추어 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의 시 속에 내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그런 때 말이다.
또, 그가 작품만 가지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아내와 함께 닭을 키우거나 돈을 벌기 위해 번역을 하는 그런 생활적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그의 문장 속에서 다양한 생각과 삶이 그대로 느껴진다.
결론은 적극적인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설움과 고뇌와 노여움과 증오를 넘어서 적극적인 정신을 가짐으로(차라리 획득함으로) 봉사가 가능하고,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 전체가 봉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에서 비로소 생활이 발견되고 사랑이 완성된다.
비록 초 끝에 묻어 나오는 그을음같이 연약한 것일지라도 이것을 잡는 자만이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마음에는 모_든 것이 아름답게 비치는 것이다.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질 때가 있었다. 시인인 작가와 세상의 연결은 참 다양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천천히 조금씩 읽어내려가면서 시인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진다. 책의 끝자락에 있는 그의 마지막 완성되지 않은 장편소설의 앞부분을 읽다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 완성되었으면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김수영 작가의 시를 가끔 꺼내서 읽어보면 참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그의 작품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마음에 남아있으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