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의미 부재를 보는 아마추어적 관점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부잣집 아들 김희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원래 예술의 본질은 '무용(無用)하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비천한 생활필수품에서 해방된, 존경스러울 정도로 무익한 생활의 증거들 속에서 품위를 발견한다.
우리가 찍는 사진도 본질적으로 무용하며, 의미의 부재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바로 '예술성'이다.
나와 내 아마추어사진가들을 '예술가'라고 부르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해 보인다.
올해도 ‘연말 전시회에 사진을 제출해 달라‘는 동호회 운영진의 요청을 나는 못들은 체 했다. 한 동안 홈페이지에도 들어가지 않고, 잠수를 타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년에도 거절했으니 ‘올해도 그러려니’하고,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겉으로는 ‘적당한 사진이 없다’고 말했지만, 내심으로는 ‘실없는 짓 같아서'였다.
실없는 짓...
물론 이건 전시회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하는 짓이 그렇게 비친다는 얘기다. 사실 오래 전에 다른 사진동호회에서 개최한 전시회에 사진을 내고 몹시 후회했던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별 생각 없이, ‘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제출했다. 꽃 사진이었는데, 희귀한 야생화도 아니고, 동네 개울가에서 찍은 평범한 꽃을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개울물에 반사되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가에 꽃이 핀 덤불이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어 덤불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흔들림이 너무 빨라 셔터속도가 꽃송이를 멈추지 못했고, 꽃은 뭉개져서 얼룩이 되고 말았다. 물 위에 떠다니던 빛이 덤불 사이에서 조각조각 부서졌다. 역광에 풀숲이 환하게 밝혀지고, 빛이 넘치면서 꽃의 형태가 여기저기 지워졌다. 선과 색이 범람해서 사물들의 경계가 사라지고 형태가 모호해졌다. 뷰파인더 안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과 같았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제목을 뭐라고 붙였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 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별 볼일 없거나 너무 유치해서 잊어버리고 싶은 제목이었을 것이다. 사진이 든 액자 아래, 해설(일종의 캡션)을 써서 붙였는데, 나는 거기에 촬영 시의 상황을 적었다. 사실 그 사진은 사진이기보다는 그저 구성이 아름다운 ‘그림’에 더 가까웠다. 사진 속 이미지는 피사체를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고, 형체의 구체성을 벗어난 ‘얼룩’일 뿐이었다. 사진적 의미는 생각할 수 없고, 그저 소소한 장식품 같았다.
한데 문제는...
액자에 넣어져 갤러리 벽에 걸린 것을 보니, 그 사진은 그림으로서도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았던 것이다. 모니터로 볼 때와는 달리, 액자에 든 채 갤러리 벽에 걸려 있다 보니, 자연히 그림(회화작품)과 비교하게 되었던 것 같다. 엎친데 덮친 격이랄까, 사진틀도 사진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프레임의 색상도 틀의 여백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지의 밀도에 비해 인화한 사진의 사이즈도 너무 컸다. 나는 무늬가 심플하고 여백이 넓은 액자에 사진은 상대적으로 작게 인화해서 넣고 싶었다. 하지만 단체전이어서 (공간 배치 등의 문제로) 개인의 의견을 일일이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 사진은 아무 내용이 없이 그저 벽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처럼 제시되었음에도, 볼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같은 전시회에서 ‘도봉산의 사계’라는 제목으로 다른 동호인이 전시했던 사진이 기억난다. 어떤 면에서 그 사진은 내 사진과 정반대였다. 도봉산 어느 봉우리를 사계절에 걸쳐 같은 위치에서 촬영한 넉 장의 사진을 한 장으로 편집한 것이었다. 사진은 명백히 기록물이었고, 사진 자체에서 별다른 미적인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가을 산은 단풍이 아름답지 않았고, 눈이 쌓인 겨울 산봉우리가 멋지게 찍힌 사진도 아니었다. 운해가 낀 장면도 아니었고, 아침저녁햇살이 봉우리를 비추는 장면을 찍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늘 다녔을 등산길에 같은 위치에서 같은 프레임으로 찍은 사진일 뿐이었다. 평범한 날 한 낮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촬영되어 있었다.
나는 당시 그 사진이 전시회에 ‘더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가에게 미적인 의도가 없었기에(내 생각에 그랬다) 사진은 시각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사진이 전하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서로 다른 계절에 같은 위치에서 같은 것을 바라봤으니 사진에 담긴 것은 그 '시간'이고 사진가는 '시간이 해 놓은 일'을 보면서 자기가 느꼈던 감회를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사진가의 존재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회의가 들기는 했다. 누구라도 별 어려움 없이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의도 자체가 너무 평범하고 간단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보는 것 만으로 충분하고, 사람들은 최소한 사진가의 의도에 대해 어떤 의혹도 품지 않을 터였다.
나는 전시회 기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누군가 내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뭘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을 쳤다. 만일 누군가 “이 사진을 왜 찍었나요?” 하고 물어보았다면, 아마 나는 완전히 ‘멘붕’에 빠졌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 의미도 없으니 아름답기라도 해야 할 텐데 아름답지 조차 않으니, 나는 그저 ‘공연한 짓’을 한 셈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이유나 명분이 필요할까?‘
전시회에 사진을 거는 이유는 남들에게 ‘사진을 보라’는 것이다. 그건 자기가 찍은 사진을 남들 앞에 제시해서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보라’고 권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들도 뭔가 기대를 할 것이다. '의미'니 '내용'이니 하는 빤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뭔가 말을 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아무 이유 없이 남들 앞에 사진을 투척하는 건,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느닷없이 ‘악수하자’고 청하는 격 아닐까? 의도를 묻는 질문에 적당한 답을 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 겸연쩍게 느껴지는 것만 봐도 그런 것 같다.
'그림이 아니라면, 내용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사진이 그 자체로 충분한 볼거리가 된다면, 따로 이유를 대거나 명분을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드물고 희귀한 장면이거나, 한 폭의 그림으로서 유별나게 아름답다면, 아무도 (사진을 보여주는) 이유나 명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은 사진가가 사진을 자기 앞에 제시한 데는, '어떤 다른 뜻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전시회에서 나는, 내 사진이 볼거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적당한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러고도 따로 그 의미나 내용에 관해 미처 생각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변명 삼아, 뭔가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식의, 막연한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구경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진기한 장면을 사진 찍어와서 남들에게 보여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이것 좀 보세요! 정말 신기하지요!"
그런 사진활동에서 나는 어떤 의미나 만족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사진이 그림(회화작품)처럼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을 그림의 일종인 것처럼 보는 관점은 회화의 세계를 잘 몰라서 빚어지는 어이없는 오해일 뿐이다. 사진은 이상적인 그림이 될 수 없을뿐더러, 그러려면 굳이 사진을 찍을 이유도 없을 터였다. 사진은 사진 만의 세계가 따로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따라서 최소한 사진이 사진가의 '작품'이 되려면, 그 안에 뭔가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남에게 전하는, 그 메시지는 진부하지 않고 새로워야 할 것 같았다. 남이 한 말을 반복하는 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실없는 짓이었다. 사진의 말은 남들 주목을 끌 수 있도록 창의적이고 특별해야 하고, 이유나 명분도 고려해야 할 터였다. '내 머릿속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런 창의적인 말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일이 더 어렵게만 여겨졌다.
전시회뿐 아니라, 평소 사진동호회 게시판에 사진을 올릴 때도 나는 고민이 많았다. 사진동호회 게시판에 사진을 올리는 일은 개인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블로그나 개인홈페이지에 올리는 사진이 '보려면 보세요' 식이라면, 사진동호회 게시판에 사진을 올리는 건, '이 사진을 좀 보세요' 식이다. 전자는 소극적/피동적인데 비해, 후자는 훨씬 적극적/능동적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개인홈페이지나 블로그가 사적 공간의 성격이 강한 반면, 사진동호회는 공적인 성질이 강해서 일 것이다.
제목은 뭐라고 붙일까?
이걸 왜 찍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찍은 걸까?
너무 흔한(혹은 빤한) 사진은 아닌가?
그러고는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사진 올리기를 포기하고 만다. 남들에게 보여 줄 명분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사진의 '의미' 문제는 단순히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 나에게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의미'는 사진을 찍을 때는 아무 문제 없었지만, 남들에게 보여줄 때 문제가 되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책임하게 사진만 내던져버리면, 그건 일종의 '테러'가 될 것 같았다. 나 스스로도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사진에 그럴듯한 댓글을 달아 주려고, 모니터 앞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내 사진동무들을 생각하면 그랬다.
전시회에 걸 사진을 고르면서 관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듯이, 사진집을 내는 작가가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듯이, 인터넷 게시판에 사진을 올릴 때도 그 사진을 보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고, 전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잘 지은 제목 하나만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거창하게(?) 사진전시회를 하는 경우라면, 조금 더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게 사진 안에 담겨있든, 아니면 전시회 팸플릿에 전시취지 형태로 적혀있든 또는 전시된 사진 밑에 캡션 등의 형태로 텍스트가 되어 실려 있든.
'의미'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어떤 물건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가치를 인정할 수 있고,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시각예술에 국한해서 생각해 보면, 작품 그 자체가 감각적으로 관객을 충분히 압도했다면, 사람들은 굳이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이 맛있는 데 (맛이 왜 이러냐는 식으로) 굳이 의문을 품을 일이 없는 것처럼. 설사 궁금증이 생긴다 해도, 그 때의 의문은 중요하지도 필수적이지도 않다.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고, 부차적이라 굳이 대답을 할 의무도 없다. 또는 문학작품처럼, 이미 의미로 똘똘 뭉쳐진 그런 것을 두고도 의미에 대한 질문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사진은 그런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사진(최소한 아마추어사진가의 사진)은 의미를 부여해야, 비로소 의미를 띠게 되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경우, 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 ‘목적’이나 ‘쓰임새’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 필자가 미국에 있는 사진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가장 당황했던 것이 어느 선생님이나 항상 “이 사진을 어디에 팔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어디에 출판할 것인가?“를 물어볼 때였다. (김성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사진강의 노트 p37) ]
아마추어사진가와 전문사진가들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촬영 전에 사진의 ‘쓰임새’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지 여부에 있는 것 같다. 잘 따져보면, ‘쓰임새’가 대게 '목적'이나 '의미'와 연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쓰임새 => 목적 => 의도' 그러면 자연히 '의미'를 알 수 있다. 삶에서 의미를 느끼려면 자기 존재의 이유(소명(召命))를 발견해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먼저 그 ‘쓰임새’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쓰임새'가 정해지면, ‘목적’이 드러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의도’를 품게 되고, 의도가 담긴 사진은 결국 그런 '의미'를 품게 된다.
전문사진가는 대체로 그 사진을 찍어서 어디에 어떻게 쓸지 이미 정해 두었거나, 혹은 사진의 주제를 미리 정한 다음, 거기에 맞춰서 사진을 촬영하는 편이다. 아니! 그런 것 같다. 말하자면, 사진의 용도가 미리 정해져 있어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뚜렷한 목표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목적의식이 있으면, 아무래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하게 되고, 의도대로 표현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의도가 잘 표현된 사진을 찍게 될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들의 사진촬영은 그런 식이 아니다. 우리는 목적의식 없이 사진을 찍고, 나중에 의미를 갖다 붙이려고 든다. 주제에 대한 특별한 인식 없이, 사진을 무엇에 쓸 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시각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사진에 담으려고 든다. 주제나, 그 사진의 의미나, 혹은 용도 같은 건 뒤에 생각하자는 심산이다.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 안 했을 수도 있다.
[ 사진 작업을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어떤 주제를 촬영할 것인가 다. 사실상 주제를 정하지 못하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천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는 기능사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학교에서 한 학기 내내 주제를 정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고, 마지막에 몇 주 동안 촬영하고 마무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김성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사진강의 노트 p164) ]
그래서 이제라도 미리 목적과 주제를 분명하게 정한 뒤에 사진을 촬영하는 방식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목적과 의도를 미리 정해서 사진을 찍는 건 어떨까?
근데 그게 가능할까?
효율적이기는 할까?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런 시도는 늘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서 좌절되고 말았다.
나와 내 사진동무들은 주로 ‘실제현실'에 있는 사물들을 사진의 피사체로 삼는다. 자료사진도 다큐멘터리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실제현실'을 대상으로 삼아 사진을 찍는 일종의 '스트레이트 사진'이라는 뜻이다.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그 ‘현실’은 물론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피사체를) 탐색하거나 선택할 수는 있지만, (원칙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장면을 연출하거나 피사체를 제작해서 사진을 찍는 경우는 아닌 것이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리 '일정한 의도'를 품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셈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이랬다.
현실에는 늘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마련이라, 피사체들은 좀처럼 '나의 의도'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접근하기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나의 의도를 반영하기에는 미흡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멋진 사진을 상상해도, 아예 볼 수 없거나, 만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과 노동이 필요했다. 내가 가진 장치도 역시, 나의 의도를 구현하는 데 있어, 미흡하거나 걸림돌이 되었다. 막상 머릿속에 그렸던 그 장면을 만났을 때, 필요한 렌즈가 없었거나 카메라 성능이 따라주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엄청난 벽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출발부터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미리 '목적과 의도를 품고 그에 따라 사진을 찍는다'는 말을 뒤집으면, '목적에 맞지 않는 사진은 찍지 않는다'는 말이 되었다. 멋진 장면이 눈앞에 있는데도 (필요 없으니) 사진을 찍지 않고 그냥 지나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매 순간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촬영 대상이 되는 외부세계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미리 촬영할 사진의 주제를 정하고, 특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사진을 찍으러 나선다는 게 정말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사전에 생각한 주제나 목적이 얼마나 구체적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면, 촬영활동에 상당히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따로 인위적 활동이 개입되지 않는 사진에서 '미리 의도를 품고 촬영하는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리 목적을 생각하고, 주제를 정해서, 의도에 따라 작업(표현)을 하는 식이라면,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 좀 더 적극적인 행위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건 곧 촬영할 장면을 연출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방식들일 것이다. 그 때는 사진가가 자기 의도가 잘 반영된 사진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우리가 추구하는 사진은 그런 사진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다. 나는, 평소 사진을 찍을 때, 의미나 소통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진을 전시할 때, 비로소 사진의 의미나 소통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주로 사진에 붙일 제목을 정하려다가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사진에 어떤 메시지가 담겼을까? 혹은 어떤 메시지가 담겼다고 말하면 좋을까?’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라 사진을 ‘써먹을 때’ 그런 생각을 하는 셈이다.
‘지금 전시하려는 이 사진이 남들에게 보여줄 만 한가?’
‘갤러리 벽에 걸만한, 특별한 이유(가치나 명분)가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이 모든 생각의 결론들을 모아서 함축시킨, 멋진 제목을 지어내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그 때 처음으로 사진을 평가하고,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근데 그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억지로 갖다 붙인 의미는, 마치 다른 차종에서 떼어 온 부품처럼, 잘 들어맞지도 않았다. 사진과 제목이 따로 놀았다. 그래서 몇 차례 이런 시도를 해 보았다. 처음부터 전시회에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목공은 처음부터 어디에 놓을 지 누가 앉을 지, 의자의 쓰임새도 정하지 않은 채로 의자를 하나 완성했다. 그리고는 의자를 놓을 장소나 그 물건을 살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사진을 찍는 방식이다. 그렇게 촬영 당시에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를 나중에 생각하려다 보니 무리가 있는 것일 터였다. 어떤 전시를 할 것인지, 미리 콘셉트를 정해두고 사진을 찍는다면, 그 의도에 잘 맞는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목적과 의도가 분명하니, 뒤에 고민에 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게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사진의 의미를 다른 데서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용도가 분명해서 사진을 찍는 목적과 의도를 미리 결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굳이 따로 의미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용도가 곧 가치고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내 사진동무들의 사진찍기에는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다. 쓸모와 무관한 사진이어서 어쩌면 무의미는 거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도리어 전문사진가들이 사진을 두고 '의미 운운한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분들은 '의미 문제'로 고민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사진의 쓰임새가 곧 의미일 것이고 처음부터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업사진가나 광고사진가는 고객과 의뢰인의 요구에 부응해서 사진을 찍게 될 것이다. 보도사진 기자 역시 데스크의 의도를 가늠하고, 신문 기사에 맞춰서 사진을 찍는다. 쓰임새가 정해져 있으면,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가 생기고, 의미는 자연스레 존재하는 것이다. 그 목적과 의미는 명확하다. 의뢰인을 만족시키면 생활필수품을 구입할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율권의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만, 따로 사진의 의미 문제를 두고 고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의뢰인의 요청을 이해하고, 그 목적 달성에 필요한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남이 내린 지침에 따라 (그야말로 기능적으로) 일을 실행하는 것이다.
한데 우리는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쓸모'를 통해서는 의미가 생겨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부잣집 아들 김희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원래 예술의 본질은 '무용(無用)하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비천한 생활필수품에서 해방된, 존경스러울 정도로 무익한 생활의 증거들 속에서 품위를 발견한다. 우리가 찍는 사진도 본질적으로 무용하며, 의미의 부재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바로 '예술성'이다. 나와 내 아마추어사진가들을 예술가라고 부르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해 보인다.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사진을 찍는 목적은 '자기만족'이다. 그 사진들의 '쓰임새'는 오로지 발표(전시나 출판 혹은 인터넷 게시 등)뿐이다. 발표는 일종의 소통이고 소통을 하려면, 할 이야기, 즉 주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의미가 구체화 되는 과정은 (쓰임새에 따른 목적 보다는) '사진의 주제를 정하는 일'과 같다. 하지만 그건 어렵고도 막연한 일이다. 여성을 매혹적으로 보이게 한다거나, 의상을 돋보이게 하거나,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찍는 것처럼 구체적이지 않다. 또한 그 뒤에 숨은, (옷과 화장품이 잘 팔리게 하고, 식당에 사람이 많이 들게 만든다는 등의) 목적과도 성질이 전혀 다르다. 어쩌면 굳이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창안해서 남들 앞에 피력하는 구차한 일일 수도 있다.
답만 알아내서 될 일도 아니다. 그 전에 문제부터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사진을 찍는가? 답이 없는 질문들을 하면서, 머리를 쥐어짜서 의미를 창안해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나는 특히, 참신한 주제를 창작해 내는 일이 유난히도 어려웠던 것 같다. 그냥 골똘히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골똘히 생각해야 할 처지에 내몰리게 된 것 같았다. 어쩌면, 사진을 찍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러니까 또 다른 지식을 쌓아야 하는 새로운 숙제를 떠 안은 것일 수도 있었다. 주제를 정하는 일이 사진과 별개로, 창의성을 요하는 또 하나의 과제가 되어 내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난감한 건, 그 일의 성질이 ‘감각의 문제’가 ‘지식의 문제’로 치환(置換)되어야만 한다는 부분이었다. 둘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어서, 한데 섞일 수 없는 속성인 것 같았다. 컵이 하나뿐이어서, 어느 하나를 가득 채우면 다른 쪽은 들어갈 자리가 없는, 애매한 형국이었던 것이다. 감각만 쫓아서 사진을 찍어왔던 나는, 의미 문제로 인해 ‘감각을 억제하거나 통제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사진이 그림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도봉산의 사계'처럼 미적 감각이 배제된, 자료로서의 사진이 되는 것 역시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아마추어 사진동무들의 입장도 대부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