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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Oct 21. 2023

·포토샵을 배워야 할 이유

사진 후보정에 대한 관점


나는 '가짜 감동'은 느끼고 싶지 않다.


아파트 단지


[ 나는 원래 포토샵 등을 이용해 사진을 수정하고 편집한다는 것을 싫어했다. 동네 카메라 가게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토샵을 쓴다고 전혀 문제될 건 없어요. 포토샵은 그냥 이미지를 현상하는 작업과 비슷해요. 예전에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화학약품을 대신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 (…) 특별한 색깔, 누군가의 눈에 비친 섬광, 변덕스럽게 바뀌는 하늘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그것을 사진에 담았다면, 그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도 똑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셔터시스터즈.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 p152) ]


디지털 사진은 (필름사진처럼) 광학적 원리와 화학반응을 통해서만 제작되지는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 내부에는 이미지 보정작업을 수행하는 알고리즘이 탑재된 장치가 들어있다. 그것은 사람이 포토샵을 이용해서 후보정을 할 때와 꼭 같은 작업을 수행하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자동으로 (이미지 보정작업이) 실행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카메라 내부에 설치된 그 일률적인 이미지 처리 알고리즘을 통해 제작된 JPG파일 만이 원본사진이라고 주장한다면, 시대에 뒤쳐진 사람으로 의심을 받을 만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건 카메라 제조사의 개발자들 손에 의해 후보정이 된 사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글은 ‘사진 후 보정은 해도 되는가?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 ‘포토샵 등을 이용해서 변형한 사진을 볼 때 흔히 갖게 되는, 그 거부감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디지털 사진편집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관점은 ‘디지털 사진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오해’라는 것이다. 놀랄 말도 아니고, 새롭거나 특별한 견해도 아니다. 이런 생각은 오래 전, 디지털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초창기에 한 동안 화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사진가들 사이에서 이미 통념으로 굳어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최소한 '가짜 감동'은 느끼고 싶지 않다.




사진동무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포토샵으로 사진에 손을 대는 건 사진을 망치는 짓입니다.'


그리고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는데, 요점을 정리해 보면, 이런 얘기였다. '연출을 하든 렌즈 앞에 필터를 달든 장 노출을 쓰거나 카메라를 흔들어서 그림같은 사진을 찍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없지만, 포토샵을 하는 건 사진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조작해서 남을 속이는 파렴치한 짓이다.' 나는 격한 표현을 쓰는 그 분의 말에서 포토샵으로 사진을 보정하는 사람들을 향한 증오심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혹시 내가 그 동안 보여준 사진들이 포토샵을 한 티가 너무 심하게 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앞에서는 아무 대꾸도 못했지만, 나는 물론 그 분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디지털 사진에서 포토샵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카메라에서 나온 JPG파일이 전부라고 믿는 것은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DP점의 자동인화장치에 갖다 맡기면서, 원하는 사진이 나오도록,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다. 디지털카메라에 내장된 이미지프로세싱 모듈이 모든 사진을 일률적인 방식으로 현상/인화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진가는 자기 개성과 취향을 드러낼 또 한번의 기회를 놓칠 뿐 아니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대폭 줄이는 효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나는 그 분의 입장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사진이란, ‘장치를 이용해서 그림을 만드는 작업’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사진제작은 기계장치를 이용해야지 사람이 직접 개입해서 그림을 그리는 건 반칙이다. 그런 행위는공정하지 못하고 게임의 룰에도 위반될 뿐아니라, 결과적으로 사진 본연의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만든다. 그래서 사진에서 어떤 효과를 얻고 싶다거나 미흡한 부분을 해결해서 더 나은 사진을 얻고 싶다면, 대상(피사체와 관점)을 신중하게 선택하거나 적절한 장치를 써서 대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명암의 대비상태가 좀 더 강렬한 사진을 얻고 싶다거나 반대로 톤이 부드러운 사진을 원한다면,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하고, 여의치 않으면, 연출해서 만들어 내거나 그런 특성이 강한 렌즈나 필터 등을 사용해서 해결해야지, 포토샵에서 커브를 구부리거나 블러효과 같은 걸 이용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카메라와 기계장치를 통한 객관적 기록의 가치를 중시하는) 그런 관점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해도,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는 한, 포토샵 작업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건 과거 암실에서 하던 작업과정이 컴퓨터로 넘어온 것이기도 해서 새삼스런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왜곡하지는 말고 적당히 하라’거나, 아니면 ‘티가 안 나게 제대로 하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 동안 간절하게 원했지만, 카메라 장비와 기회의 한계 때문에 아쉬워했던 수많은 보석 같은 효과들을 포토샵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지털이 제공하는 그 모든 이점들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포토샵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만약 그 분이 포토샵을 모른다면, 남들이 사진에다 대고 무슨 짓을 했는지 결코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포토샵을 배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디지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뒤바뀐 2% 와 98%.


요즘 디지털 사진가들이 하는 대부분의 사진보정 작업들은 필름 아날로그 시절에도 존재했다. (너무 적극적으로 그리지만 않는다면) 그 효과 역시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돌아가신 외삼촌은 시골에서 사진관을 했다. 그는 컴컴한 암실에서 방금 현상한 필름을 들고 나와,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유리 판 위에 고정시켜놓고, 뾰족하게 깎은 연필로 정성스럽게 색칠을 했다. 어린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네거티브 필름에 검은 연필로 색칠을 한다는 건 사진 속의 어느 부분을 지우거나 흐리게(혹은 하얗게) 만든다는 뜻이다. 주로 눈썹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보기 싫은 점과 흉터를 없애고, 입 꼬리와 입술 선을 매력적인 형태로 다듬는 작업이다. 아마 어느 집에나 그런 작업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오래된 흑백사진을 몇 장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필름시절의 그런 작업들은 물론, 촬영된 사진에서 근본은 거의 건드리지 않고, 단지 '2%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때로 그 마저도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낡아서 색이 누렇게 바랬지만 사진 속 인물은 이목구비가 수려해서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인형처럼 매끄러운 피부와 초승달처럼 날렵한 눈썹에, 그린 듯이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기도 했다. 사진들을 잘 살펴보면, (카메라 앞에서 얼어붙은 듯 경직된 표정과 함께) 모든 사진 속에 들어있는, 모든 인물들에서 비슷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 분들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 지가 몹시 궁금했다.


그 뿐아니라, 나는 간혹 흠잡을 데 없이 잘 정리된 내 사진을 볼 때도 어떤 종류의 답답함을 느낀다. 사진의 프레임은 기울거나 삐뚤어지지 않아 균형이 잘 잡혀있고, 주변부는 항상 말끔하고 완벽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촬영 시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후보정을 할 때 수정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미흡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사진들은 물론 그 전에 이미 휴지통에 버렸다. 나는 천성이 일그러지거나 삐뚤어지거나, 명암이나 형태의 배치상태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무게중심이 기울어 불안정한 상태를 좀처럼 두고 보지 못하는 편이다. 아마도 내 안에 그런 부분에 대한 강박이나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컬러로 채색(보정)하고, 구성미가 뛰어난 다른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수려한 풍경사진을 볼 때도, 약간 다른 의미에서, ‘답답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뭐 하러 그렇게 까지 할까?’ 싶은 것이다. 좋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정성에 대해 생각이 미치면서) ‘굳이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꾸밀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뜻이다. 특히 옛날 사진관에서 정성 들여 제작한 그 인물사진들을 떠올려 보면, 사진에서 나타나는 외형적 아름다움이 갖는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사진의 형식미가 다른 부분을 훼손하면서 까지 얻어내야 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너무 쉽게 할 수 있는데도 굳이 하지 않을 필요가 있을까?’ 식의 유혹 같은 게 작용할 것이다. ‘간단하게 손을 써서’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그래서 자꾸 손을 대게 되고, ‘조금 더 조금 더’ 하다 보면 어느새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게 된다. 원래 '완벽한 상태’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진에서 같은 결과를 기대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면 결국 사진들이 전부 서로 닮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진이 비슷한 분위기를 띠고,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사진을 얻게 된다. 더 열심히 할수록 더 많이 그렇게 될 것이다.


카메라 내부에서 일률적으로 처리된, 그 jpg 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떤 포토샵 책의 제목처럼) 사진의 ’2%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로 주객이 전도되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뿐이다. 만약 '후보정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사진'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장롱 밑 메리야스 박스 안에서 발견한, 잘 다듬어진 옛날 인물사진들을 생각해 보면, (사진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사진가의 그 노력들이 어쩌면 '별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 사진가의 후보정 솜씨가 지워버린 그 부분을 더 보고 싶은 것이다.



후보정하기와 현상하기


요즘은 카메라에서 찍혀 나온 원본사진을 가공하고, 용도에 맞게 편집하는 과정을 흔히 ‘보정 혹은 후보정한다’고들 말한다. 디지털 사진이 나오면서 그런 표현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원본사진을 수정하고 변형하는 걸 당연시 하는 경향도 만연하게 된 것 같다. 이제 그걸 안 하면 마치 뭔가 할 일을 빼먹었다거나 공연히 손해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아마 작업과정이 너무 간단하고 쉽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더 나아질 수도 있는데) 안 하고 넘어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디지털 후보정작업을 거의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노출 차가 매우 큰 장면을 촬영한 경우, 명암의 양 극단에 존재하는 디테일까지 전부 한 장의 사진 안에 표현하려면,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시적인 영역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다. 그런 경우, 말하자면, ‘존재하지만 비가시적’인 데이터 즉, 감춰진 세부묘사나 색상 등을 드러나게 만들 목적으로 후보정작업을 하게 된다. 아예 촬영을 할 때 그런 작업을 염두에 두고 노출 값을 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진에서 그런 건 아니고, 디지털 후보정작업이 사진을 완성하기 위해 늘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은 아니다.


나는 ‘보정’보다는 ‘현상’이 더 좋은 말인 것 같다. 디지털 사진보정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보정’보다는 ‘현상’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사실 포토샵에서 사진을 열어 입맛에 맞게 고치는, 디지털 사진보정은 화학약품을 써서 사진을 현상하는 작업과는 차이가 있다. 단어의 의미상으로도 그렇다. '보정'은 '부족한 부분을 보태어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카메라에 찍힌 원본사진은 부족한 부분이 거의 없어서 (보탤 건 없고) 제거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꺼림칙한 건,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손을 대서 자국을 남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너무 과하면 인위적인 느낌을 주고, 웬만해서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 힘든 것 같다. 게다가 오늘은 좋아 보여도 내일이면 쉽게 식상해지는 경향도 있다.


셔터 막이 열리면, 피사체에 드리운 빛이 렌즈를 타고 들어와서 센서나 필름 면에 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을 화학적 혹은 전자적인 방법을 써서 정착시킨 것이 바로 원본사진이다. 원본사진은 그렇게 자연현상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 안에는 피사체가 가장 정확하고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필요한 모든 정보가 거의 궁극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담겨있다. 따라서 원본사진은 그야말로 최대한의 결과물로서, 그 이상은 없고, 그 상태가 곧 ‘한계’라고 봐야 한다. (사진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기에 인간이 뭘 덧붙이거나 고칠 부분은 없을 것이다. 만약 더하거나 고친다면, 그건 당연히 ‘그림을 그린다’는 관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 그림을 그리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현상(現像)은 ‘형상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사진을 현상하거나 (흔히 말하듯이) 후보정을 하는 과정은 ‘첨가하거나 고친다’기보다, ‘선택하고 추출하는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자연이 만들어낸 원본사진 안의 일부 특성만을 선택해서 원하는 상(象)이 되어 나타나도록 사진으로 추출해내는 과정이 ‘현상’이다. 특히 디지털 사진의 로(RAW)파일은 jpg파일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가시적인 부분보다는 비가시적인 영역 안에 실제로 더 많은 정보가 숨겨져 있다. 그 중에서 원하는 정보만을 끌어내서 사진을 만들고 나머지는 버리면, 그림을 그리지 않고도, 어떤 것을 강조하거나 원하는 표현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게 바로 사진을 현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보정(補正)’은 당치 않다. 그건 마치, 흔히 자연을 가꾼다는 것이 도리어 자연을 훼손하게 되는 경우처럼, 사진을 훼손하는 일이 되기 쉽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사람이 손을 대서 (자연이 하듯이) 완벽하게 뭘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자연을 그대로 두고 즐기는 대신, 거기 정원을 꾸미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가능하면 최대한 원본을 덜 훼손하는 방법을 선택하면 좋지 않을까?

실은...

서툰 그림솜씨로 후 보정한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를) 사진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것 같아서 해 본 생각이다.


그 사진들을 보면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했고, 그런 사진에 찬사를 보내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불편을 가중시켰다. 그림(회화) 혹은 예술작품을 동경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한 탓인지, 요즘은 사진가들이 마치 ‘조악한 그림도 사진보다는 낫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에, 사진에 사진가가 뭘 표현하려고 들었다거나 인위적으로 개입한 게 드러나면, 감동이 사라지는 경향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표현한 결과가 완벽하지 못하면, 나는 다만 그렇게 한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질 뿐이다.


포토샵은 카메라 뒤에 숨어있던 내 서툰 그림솜씨를 폭로해 버릴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포토샵으로 사진을 보정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유치한 내 취향과 개성뿐 아니라, 조악한 디자인 감각과 서툰 미술 솜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는 혹시 내 사진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그 미숙함이 빚어낸 조잡한 요소들을 눈치 채지나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했다. 그 와중에 깨닫게 된 한 가지 사실은 (비록 컴퓨터로 진행하는 메마른 작업이지만) 사진 후 보정은 결국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감각'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배운다'기보다는 느끼면서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성질의 일이었다.


따라서 책을 읽거나 방법을 배워서 금세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서 몸이 변해야 발전할 수 있고, 꾸준히 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나아지는, 그런 문제라는 걸 이제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감각의 문제는 결국 ‘몸’의 문제이기 때문에, 타고난 몸의 차이로 인해 불평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난해한 문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노력해도 될 수 없는 문제’이거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만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불공평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날로그 세계와 달리, 디지털 세상에서 제작된 결과물들은 다양성이 없이 '왠지 전부 비슷비슷하다'는 느낌도 든다. 


글쎄, 그게 그저 단순히 '내 느낌일 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원본이 지닌 일정한 한계와 제약이 있고, 포토샵 등이 제공하는 기능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그런 면이 있을 것도 같다. 어쨌거나 그냥 '좋은 그림만 만들면 된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요즘, 그 부분이 사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좀 줄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후보정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나에게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실망한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로 의미를 잘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이미지의 미적 조형성에 치중했지만 이제 약간 시들해졌다고나 할까?




사진가는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앞의 세계에서) 어느 순간, 어떤 부분을 선택해서 프레임에 담고 다시 사진을 현상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의 선택을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진을 찍으면서 찍지 않은 것들을 제외시켰고, 현상해서 필름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뭔가를 배제한다. 그래서 남는 게 바로 사진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사진을 본다는 건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어떻게 보았는지 등) 그의 관점과 시각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진가가 했던 그런 여러 선택들을 음미하면서 사진을 읽게 되며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굳이 (뭔가를 바꾸거나 추가해서) 관람객들의 감상에 혼란을 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만약 같은 대상을 같은 조건에서 찍은 사진이, 다른 사진들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색감이나 톤을 보여준다면, 그건 사진을 찍을 때 사용했던 장치의 특성일 가능성이 크다. 예전 같으면 렌즈와 필름의 특성이고, 요즘은 필름대신 이미지센서나 카메라제조사가 만든 이미지프로세서의 특성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만일, 같은 조건, 같은 장치를 써서 찍은 사진이 서로 색감이나 톤에서 차이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후 보정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미 제작이 끝난 뒤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일 뿐이고, 정작 사진에 차이가 나타나는,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원인은 당연히 '찍기 전의 상황'에서 찾아봐야 한다. 물론 '같은 조건'이라는 전제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지도 의문이긴 하다.


사진 이미지의 특성은 거의 전적으로, 사진가가 무엇을 어떤 빛에서 촬영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사진에서의 빛’은 단순히, 조명의 종류나 아침저녁 혹은 한낮의 태양광처럼, 빛 그 자체 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핵심은 사진가가 빛을 의식하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방향과 각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피사체를 가운데 두고 광원과 대치하면 역광에서 사물을 보게 된다. 옆으로 비켜서면 측광이 되고 내가 피사체와 광원 사이에 끼어들면 순광이 된다. 물론 이걸 ‘세 가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미세한 각도차이가 사진의 외형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역광에서 바라볼 때, 시선의 미세한 각도차이로 인해 생기는 '빛의 변주'는 말할 수 없이 다양하고 효과가 강력하다. 그걸 음미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사진가가 아닐 것이다.


사람이 몸을 써서 한 행동에는 자연스레 그 사람 특성이 나타나고 결과물에도 그 흔적이 배기 마련이다. ‘골프스윙’ 하나만 봐도 그렇다. 막대기를 휘두르는 그 간단한 동작이 사람마다 다르고 결과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사진을 찍을 때,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 동작에는 (골프스윙처럼) 물리학적 변화나 인체공학적 원리가 작용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로인해 사람의 특성이나 흔적이 사진에 밸 여지도 없다. 만약 사진에서 사람에 따른 차이가 생겨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고 봐야 한다. 사진에서의 ‘스윙’은 ‘셔터 누르는 동작’이 아니라 ‘보는 행위’인 셈이다. 실제로 사진가가 피사체를 보는 방식은 골프스윙만큼이나 다양하고 변수도 많다. 그 부분이 바로 사진가가 자기 개성과 취향을 보여줄 수 있는, 지극히 사진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사진가가 피사체를 선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남들과 차별화 된 사진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는 행위 즉, 대상에 대한 관점과 시점을 통한 사진의 차별화는 쉽지 않고, 사진가가 그것만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아이디어가 필요할 수도 있고 모험이 필요할 수도 있다. 힘들게 돌아다거나 오래 기다려야 하며 그래도 행운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어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 봤자, 아류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서, 순식간에 진부하게 변해버린다. 아마 사진에서 유난히도 사진가의 개성이나 취향 문제를 중요하게 언급하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남들과 다른 사진을 보여준다는 건, 실제로 매우 어렵고, 어려운 걸 해냈으니 인정을 받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이 후보정을 통하면 아주 쉬워진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들고 완벽한 장면과 만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사진을 대충 찍어와서 (포토샵 등에서 색을 약간 입히고 명암 톤을 조절해서) 완벽한 사진을 만들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이 아쉽다면, 컴퓨터 저장장치를 뒤져서 전에 찍어둔 사진들 중 멋진 구름이 찍힌 것을 찾아서 합성하면 된다. 심지어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거나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하고 참신한 사진을 그리는 일도 가능하다. 그 외에 머릿속 아이디어를 사진으로 구현하는 다양한 작업들도 현실에서 연출하거나 실물을 제작하기 보다는, 책상 앞에 앉아서 마우스나 타블렛의 터치펜을 써서 그리는 편이 훨씬 쉽고 경제적이다.


그래서 나는 사진에서 내가 느낀 감동과 거기서 읽었던 사진가의 솜씨나 개성 등이 혹시나 포토샵에 의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 판단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사진가들은 포토샵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어떤 것들이 있는 지는 대강 알아야 할 것 같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정을 확인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가치 문제를 따지기 전에, 그런 오해로 인해, 내가 공연히 쓸데없는 희망을 갖는다거나 필요 이상의 존경심을 품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진에 속아 어떤 장소에 찾아가서 실망하고 싶지 않고, 거의 불가능한 표현을 나의 목표로 삼는 바람에 쓸데 없이 애를 태우고 싶지도 않다. 물론 '가짜 감동'을 느껴서 놀라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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