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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Oct 20. 2023

그림 대작사건에 대한 단상

작품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일까?

사진이 ‘내 작품’이라는 생각은 혹시 어떤 오해나 착각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나는 늘 그런 방정맞은 생각에 시달렸다.

장치에서 나온 프린트에 내 서명을 적어 넣는다고 해서 그게 ‘내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법적으로는 인정을 받겠지만, 내가 내 사진의 진정한 주인이 맞을까?

나는 지금 정서적인 관점에서 묻는 것이다.


명동거리

그림 대작사건으로 기소된 조영남씨가 얼마 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아는 화가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림을 그려오게 한 뒤, 위에 덧칠만 하고 자기 서명을 넣어 팔았다. 화투를 소재로 한 바로 그 유명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났으니 ‘남을 시켜 그린 그림을 자기 그림인양 팔아도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그리고 이제 그 그림은 '그의 작품'이라고 보면 되는 걸까?


그건 아니다.


조영남씨는 ‘저작권 분쟁’이 아닌 ‘사기죄’로 기소되었고, 그 부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은 것뿐이다. 그림을 그려준 화가가 저작권을 주장해서 문제가 된 게 아니라 그림을 산 사람들이 ‘사기를 당했다’며 그를 고발한 것이다. 자기들은 조영남이 그린 그림인 줄 알고 샀는데 알고 보니 남이 대신 그려준 그림이더라는 얘기다. 그래서 남이 그린 그림을 마치 자기 그림인양 속여서 팔았다며, 사기죄로 고발하는 바람에 기소된 것이다. 물론 조영남씨는 ‘그림을 그릴 때 화가를 고용해서, 자기를 보조하게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의 핵심은 ‘보조자를 써서 그린 그림을 팔 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게 사기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부분’이었다. 재판부는 ‘미술작품 거래에서 보조자를 사용해 제작됐는지 여부가 구매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무죄로 판결한 것이다. 보조자가 90%이상(재판과정에서 나온 판단이다) 그린 그 그림의 실제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은 것이다. 그 보조 화가는 저작권에 대해 아무 주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그림은 누구의 것이라고 봐야 할까?


[ 저작권법의 대원칙이 있다. ‘저작권은 표현을 보호하지 아이디어를 보호하지는 않는다’(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라는 것이다. 아이디어에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게 되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어 문화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원칙에 따라 저작물에 대한 아이디어나 힌트를 제공한 사람은 저작자가 될 수 없다. 사진촬영, 건축, 연구용역을 의뢰한 경우에 저작자는 촬영자, 건축가, 연구자이지 의뢰자는 저작자가 될 수 없다. (출처 : 법률저널) ]


저작권법에 의하면 그림의 아이디어만 제공한 조영남씨는 ‘그림의 저작권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만으로는 저작권자로 인정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법률에 의하면 ‘업무상 저작물‘인 경우는 ‘아이디어’뿐 아니라 ‘표현’에서도 보조자의 손을 빌릴 수 있고, 조영남이 화가를 고용해서 ‘업무상 저작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문제인 때문이다.


업무상 저작물이란 회사 등에 고용된 직원이 만든 저작물을 말한다. 아마 고용계약 속에 ‘업무상 만든 물건의 저작권은 고용주에게 귀속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게임 개발회사 직원이 게임 속 캐릭터를 자기가 만들었다며, 저작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곤란할 것 같다.


[ 한편, 저작권법은 법인·단체 그 밖의 사용자(법인 등)의 기획 하에 그의 업무에 종사하는 자가 업무상 작성하는 저작물을 업무상저작물이라 하고(제2조 31호), 업무상저작물의 저작자는 계약 등에 다른 정함에 없으면 법인 등이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영남씨와 A씨가 이러한 업무관계에 있었다면 저작자는 조영남씨가 될 수 있다. (출처 : 법률저널) ]


조영남씨가 화가 A씨에게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형식상 둘 사이는 ‘업무관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업무관계’가 완전하게 성립하려면, 조영남씨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일을 맡겨 버린 게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구체적으로 지시/감독을 했어야만 한다는 게 전문가의 판단인 것 같다. 만약 그는 그저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그림은 그 화가가 알아서 그리게 내버려 뒀다면 '업무관계'는 성립하지 않고, ‘저작물에 대한 아이디어나 힌트를 제공한 사람은 저작자가 될 수 없다’는 저작권법의 대원칙에 따라 조영남씨는 저작권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만약 ‘저작권 분쟁’이 있었다면 법원이 어떤 판단을 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법적 권리가 누구에게 속하든지 간에 그림의 ‘실제 주인’은 누구라고 봐야 할까? 그건 (법률 같은 세속의 이치를 따지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싶을까?’


그러니까 이치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판단해서, 더 본질적인 답이 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서적' 운운 했지만, 사실 저작권 논쟁의 핵심은 '일을 지시한 사람과 실행한 사람 사이에 업무관계가 성립하느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감정도 그런 판단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에 답을 내야 하는 문제다.


'아이디어를 갖고 일을 지시한 사람은 그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작품에 자기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작업과정에 충분히 개입했을까?'


'일을 실행한 사람은 그저 지시한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자기 손(기술)만 빌려주었던 걸까?'


결국 '완성된 작품(그림)의 실제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문제의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질문을 해보면 되지 않을까?


‘완성된 그림을 보았을 때, 누가 더 뿌듯해 하고 보람을 느꼈을까?’


그러니까 그는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대작 작가를 시켜서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칠을 곁들인 다음, 자기 서명을 적어 넣었다. 그래서 조영남씨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을까? 그런 방식으로 완성된 자기 작품을 보며 그는 마음이 뿌듯했을까? 물론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대답을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결과물을 사랑하게 된다. 결과물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댄 에리얼리.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들) ]


작품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완성된 자기 작품을 보고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도 창작활동이 주는 그 희열 때문에 열정적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의미 역시 작품에 들인 피와 땀의 양만큼 그리고 투입한 시간만큼 느끼게 된다. 그건 흔히 산고(産苦)에 비교하는, 힘든 과정을 스스로 극복해 낸데 대한 일종의 성취감일 것이다. 또한 오랜 노력 끝에 성장하고 발전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에서 오는 자기만족일 것이다.


‘ 그래서, 모든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그런 것을 조영남씨도 충분히 느꼈을까? ‘


사실 (다분히 정서적인) 이런 문제까지 법적으로 판단한다는 게 옳은 일인가 싶기도 하다. 표현에 개입한 정도를 따져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양은 몰라도) 질적인 부분까지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법이 만연하다 보면 상식이 파괴될 수도 있고 그러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 가게 된다. 당사자들 간의 일이고, 진실은 두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화가가 충분한 대가를 받았고, 조영남씨가 떳떳하다면 그만이다. 다행스럽게도, 화가가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은 건 '그래서'가 아닐까?



아무튼 그래서 작품의 실제 주인은 누구일까?


그 행위가 불법인지, 법적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그만두고, 나는 그 부분이 가장 궁금했다. 왜냐하면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늘 느껴왔던 어떤 부정적인 느낌이 바로 그 부분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림 대작사건에 관한 기사를 보다가 생각이 문득 사진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내가 찍은 사진은 내 작품이 맞을까?’


[ 우리는 그림을 화가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감성과 독창적인 솜씨가 창작해낸 주관적 생성물로 보는 반면, 사진을 중립적인 기계의 객관적 산물로 여긴다. 말하자면 그림은 화가의 재능이 상상적으로 표현된 것이나 사진은 작업주체의 흔적이 없는 기계의 법칙과 화학 약품의 결과물이라는 통념이 있다. (김화자. 푼크툼의 사진현상학 p21) ]


사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을 볼 때, 다른 작업의 창작자들이 느끼는, 그런 종류의 희열은 맛보기 힘들었다. 그건 물론 사진이 지나치게 장치의존적인 작업인 때문이었다. 사진은 너무 쉽게 만들어질 뿐 아니라, 자동적/기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때로는 거의 나와 무관하게 만들어졌다. 내가 찍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제작과정에 직접적인 내 역할이 적었을 뿐 더러, 결과물에 내 손길이 닿은 흔적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점이 항상 나를 맥 빠지게 했다.


남이 그려준 그림에 덧칠을 하고 서명을 해서 자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는(또는 믿는) 조영남씨의 입장과 내 입장에 차이가 있을까? 나는 종종 카메라에서 찍혀 나온 사진을 보며 내가 마치 그 사진의 관람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고 감탄할 때가 있다. 사진의 결과물은 너무나 훌륭한데, 내가 했던 역할은 '너무나 사소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혹시 조영남씨도 완성된 그림을 보았을 때, 화가의 표현 아이디어와 작화솜씨에 탄복하며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조영남 씨의 경우는 실제 ‘표현’을 한 당사자가 다른 ‘사람’이고, 나의 경우는 그게 ‘카메라’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사진 제작은 카메라가 맡아준 셈이다. 제작자가 사람이라면 자기 저작권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카메라는 그럴 일이 없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리는 없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작품제작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보람이나 성취감 또는 만족감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뿐, 그 밖에 구체적인 지시를 추가한다거나 진행과정을 점검하고 피드백을 받아, 다시 지시하는 등 나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한 세세한 작화과정에는 개입한 바가 없었다. 셔터를 누르자마자 그림이 완성되는 바람에, 나는 처음에 약간의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뿐, 정작 중요한 ‘표현’은 장치가 다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마치 모든 코스를 차를 타고 달려 버린 마라톤 선수나 틀을 써서 도자기를 찍어낸 도공이 느꼈을 법한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한데 아이디어를 중시하고, 정작 '실행'은 경시하는 그런 관점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그런 관점을 예술활동에 적용해도 괜찮은 걸까? 그런 건 (실행이 간단하고 기계적이라)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라도 쉽게 구현할 수 있는 일에서나 합당하지 않을까?


나는 오래 전에 어떤 조각가를 만나서 그와 악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마치 울퉁불퉁한 나무둥치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온통 굳은 살이 백인 손바닥 피부는 사포처럼 거칠었다.

누군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그에게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면, 그는 어떤 기분이 들까?

물론 완성된 조각품은, (대가를 지불하고) 의뢰한 사람의 작품으로 발표될 것이다.

조각가는 극심한 비애를 느끼지 않을까?

어쩌면 그 화투 그림을 그린 화가도 같은 느낌이었을 지 모른다.

다만 대가로 받은 돈이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기에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공산품을 만들 때나 적용될 법한 그런 관점을, 예술활동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나간다는 게 타당한 일일까? 그렇게 비약해 나가다 보면, 조만간 예술활동뿐 아니라, 체육활동에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 때는 선수보다는 감독과 코치가 더 훌륭한 스포츠맨이 되는 걸까? 아니! 구단주나 기업회장이라고 봐야 할까? 최소한 예체능 활동에서는 아이디어보다는 실행의 기능을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예술작품에 표현이 깃드는 것도 거의 그 실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것이다. 아이디어는 일의 발단이 될 뿐, 작품은 정작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어 갈 것 같다. 그러니 그런 성격의 활동에서는 아이디어와 실행과정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될 것 같다.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을 ‘내 작품’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잘 안 된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일을 맡은 쪽이 '카메라여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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