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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Nov 15. 2023

·아마추어도 철학적 방황은 한다

왜 사진을 찍는가?

글을 쓰는 이유는...

알고 있는 걸 종이 위에 옮겨 적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쓰는 경우가 더 많다.

사진을 찍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마네킹은 왜 모두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들을 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왜 마네킹에 표정을 그려 넣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냥 표정을 만드는 것 보다 무표정을 만들기가 더 쉬웠을까?

그래서 표정을 만들지 않은 탓에 표정이 생기지 않았고, 무표정이 되었던 걸까?

그게 아니면 혹시 어디에 놓일지 몰라서, 어디에든 놓일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싶었던 걸까?

한데 나는 왜 마네킹의 무표정을 보면서 심기가 복잡해지는 걸까?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블로그 이웃이 ‘왜 사진을 찍느냐? 는 질문을 받을 때 가장 난감하다‘ 고 댓글을 달았다. 댓글을 보고 나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들고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남에게 대답하기 전에 먼저 자기 내면의 답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사실 질문은 예전에 이미 던져졌다.


‘나는 왜 사진을 찍는가?’


그러나 답은 아직 내지 못한 상태여서,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 “나에게 사진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진을 왜 하는가?“ 지난 50여 년 동안 나를 괴롭혀 온 질문들이다. 이 물음은 다시 ”삶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라는 문제와 일치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평생을 이와 같은 질문들과 싸워온 것 같다. (최민식. 사진이란 무엇인가 p5) ]


물론 아마추어사진가가 굳이 그런 질문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은 든다. 질문이 너무 무겁고 깊이가 있어서, 도무지 아마추어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부담스럽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 질문이 결국 '삶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라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은 아마추어가 자기 취미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지나치게 진지한 얘기로 번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나는 사진이다‘


어떤 사진가는 자기가 쓴 책제목을 그렇게 지어서 자기 자신과 사진을 동일시했다. ‘어떤 일이 곧 자기 자신이나 자기 삶과 일치된다'는 말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 일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일생을 바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루어낸 사람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따라서 사진으로 벌어먹는 전업사진가나, 삶 자체가 사진으로 점철된 사진예술가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자기 삶이 따로 있고, 사진은 곁다리로 하는 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속단할 일은 아니다. 그의 직업이 생계를 위해 피치 못해 하게 된 '곁다리'이고, 알고 보면 사진이 정작 그의 '삶'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정부 메이벌은 그녀가 설거지한 그릇에 의해 기억되지 않는다. (조안B 시율라. 일의 발견 p56)]


일을 통해 삶을 즐기고 삶의 의미 또한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즐겁고 의미가 충만할 뿐더러,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생계까지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건 일부 선택 받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혜이고 인생의 로또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에서 삶의 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없고, 그 허기를 채우려고 다른 일을 찾는다. 직업에서 채울 수 없었던, 삶의 공백을 채울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시작한 활동이 취미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마추어 사진가다.


한데 ‘아마추어’가 시시하다거나 열의가 모자라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마추어란 '좋아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생계를 위한 다른 일을 가진 사람이, 단지 좋다는 이유로 그 일을 하는 경우일 뿐, 초보자나 서툰 사람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아마추어라고 해서 실력이 뒤쳐지거나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열정과 치열함이 모자라서 건성으로 한다거나 진지하지 못해서 철학적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그는 따로 직업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다른 일에 열정을 갖게 되는 통에, 삶을 다소 비효율적으로 살게 된 것뿐이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부족한 시간과 자원을 관심과 열정으로 메웠던 그를 아무도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에 예술을 한다는 것은 불확실성에 맞선다는 의미다. 그 삶은 회의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뿐더러, 청중도 보상도 없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무모하게 행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베일즈 - 테드 올랜드. Art and fear -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p29) ]


물론 내가 '예술'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카메라를 쥐고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결과물 사진이 '예술작품'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고민들이 예술가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은 일의 결과에 대해 타인의 관심과 지지를 받고 싶은 것이 비단 예술가들 만은 아닐 것이다. 나도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으며, 같은 문제로 고민한다.


예를 들어 나는 블로그 방문객 수에 관심이 있고, 긍정적인 반응에는 힘을 얻지만 부정적인 댓글에는 상처를 입는다. 아마 '청중도 보상도 없는 일'을 무모하게 하고 있는, 이웃 블로거나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 분들 역시 비슷한 일을 겪을 것이고,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사진을 찍는가?’

‘사진이란 무엇인가?’


자격을 따지기 전에, 사진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마음에 품어 봤음직한 질문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예술의 품위는 ‘무용한 짓을 매우 치열하게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예술가란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에 열정을 바치느라 생계를 팽개친 사람들'이다. 그런 경향은 열정적인 아마추어사진가들의 행동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어떤 아마추어는 일(본업)보다 취미활동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입한다.


그래서 지극히 당연하게도, 노력한 일의 결과에 대해 타인의 관심과 지지를 받고 싶어 하고, 어떤 형태로든, 성과도 기대한다. 비록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서 시작한 일일지언정 의미나 가치에 대한 확신은 늘 필요한 법이니까. 청중도 보상도 없는 일을 하면서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꺼져가는 열정에 불을 지펴주는 것은 오로지 타인의 관심과 지지 뿐이고, 아마추어라고 다르지는 않다.




 사진을 찍는가?


아마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사진을 시작한 초기에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재미있으니까’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만일 내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온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좋아서, 재미있으니까’라는 말만큼 명쾌한 대답이 있을까? ‘열정’은 자동으로 따라붙고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그 대답의 유통기한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질문에 대한 ‘만능키‘ 역할을 해 주었던, ’재미와 열정‘이 수그러들자 나는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분명하게 아는 사실 하나는, 이런 질문을 손에 들고 자기 내면을 노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초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지금 이 순간, 사진이 죽고 못 살 정도로 재미있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카메라를 탐구하고 세상을 탐색하느라 열정에 들떠있는 동안, 그런 질문은 좀처럼 마음 속에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호기심과 재미로 가득 찬 그 때는, 그런 골치 아픈 질문이 들어설 틈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놀랄 일이 줄어들고, 열정도 잦아들기 마련이다.


그러면 저절로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이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무엇이든, 보상도 성과도 없는 일을 오로지 재미 하나에 기대어 계속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앞에 더 이상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 때 이 (치명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 왜 사진을 찍는가? ‘.


따라서 질문은 길을 잃은 사람의 절망에 찬 절규나 다시 길을 찾으려는 자의 몸부림 같은 것이다.


왜 찍는가?

사진을 왜 찍는가?

너는 왜 사진을 찍느냐? 혹은 나는 왜 사진을 찍을까?

대체 사진이 너에게 무엇이기에? 혹은 나는 대체 사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기에?

사진을 찍어서 뭘 하려고 또는 어디다 쓰려고 사진을 찍는가?


생각해 보면, ‘왜 찍는가?’ 라는 물음 속에는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다. 그러나 질문의 뉘앙스는 단순한 물음이기보다는 갈등과 회의에 가득 찬 탄식에 더 가깝다. ‘나는 대체 별 소용도 없어 보이는 이런 짓을 왜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질문이 ‘사진이란 무엇인가?’ 라는 또 다른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찍느냐?' 는 물음에 답을 하려다 보면 '사진이란 무엇이며, 나는 사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게 대체 뭐기에 넌 기를 쓰고 그걸 하려고 하는가?’


사진이란 무엇인가?


질문은 다시 성질이 다른 두 개의 질문으로 쪼개졌다. 하나는 ‘사진(사진자체)이란 무엇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있어서 사진은 무엇인가?’이다. 질문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자면, 전자는 사진의 정의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고 후자는 사진을 보는 내 관점에 대한 물음이다.


전자의 질문에는 사진의 객관적 정의를 말해야 한다.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혹은 ’사진은 대상의 복제물이다‘ 식이다. 물론 이런 대답이 사람의 관점이 완전히 배제된 객관적 정의 같지는 않다. 더 정확하게 대답하려면, 사진의 물질적 정의를 탐구해야 된다. 그러면 사진은 ‘인화지 위의 물감자국’이나 ‘모니터 위의 영상(image)’이라는 식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정의가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나에게 있어서 사진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는 사진에 대한 내 관점을 말해야 한다. 실제로 사진이 무엇이고,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에게 사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온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사진을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든지 ‘나는 사진을 세상과 사회에 대한 사진가의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식이다. 또는 많은 사진가들이 그랬듯이 ‘나는 사진을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비장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 대답은 사진의 가치나 쓸모에 대한 사진가의 생각이며, 사진이 갖는 의미에 대한 그의 입장을 알려준다.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왜 찍는가?" 라는 물음에도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왜 찍는가?” 는 이런 질문이 된다.


'나에게 있어서 사진이란 무엇이며, 나는 왜 사진을 찍는가?'


그러나 질문이 명확해졌어도, 답에는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다. 사진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것에 대한 입장도, 나는 어느 하나 확고한 게 없다.




나는  사진을 찍는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대답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요즘 블로그에 올리려고 사진을 찍는다. 물론 그 전에 어떤 것이 아름답거나 새롭거나 혹은 특별해 보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블로그에 올리려면 그런 것들을 사진 찍어야 한다.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서’ 라니! ‘아름다워서’라니! 이렇게 건성으로 하는 대답은 이 진지한 질문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왜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고 싶은지, 왜 아름답고 특별한 것을 사진 찍고 싶은지,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대상을 탐색할 때, 주로 선이나 모양이나 색채나 명암의 톤 등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대상이 지닌 실제 의미나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는 미적인 요소들을 검토해서 모양새를 갖추는 데 골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무엇이든, 모든 것을 사진의 관점에서 보게 되고, 좋은 사진(?)이 될 가능성이 있어야만 사진으로 채택된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오로지 사진의 형식미뿐인 것이다.


감각적으로 그런 것들에 끌리기도 하지만 그래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 외에 다른 의도나 목적이 없었으니, 사진에 메시지는 담길 수 없고 눈에 보이는 모양새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마 내가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이유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진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것이고 거기서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나는 결국 그런 식으로, 내가 가진 '욕망'에 대해 토로할 수밖에 없게 된다.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고, 삶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이다. 나는 그 동력에 의해 움직였을 뿐이고, 여기 다른 설명을 덧붙일 수는 없다. 내 감각이 외형적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어떤 원인이 있겠지만, 내가 그 과학적 혹은 심리적 근원에 대해 알거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 더 이상의 (왜 인정받고 싶은가? 왜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가? 식으로) 추가질문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뭔가 미흡하다. 마치 내가 욕망덩어리이며,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악당이라도 된 것 같다. 너는 오직 욕망과 감각에 의해서만 행동하는가? 너 자신 밖에 모르는가? 그래서 좋은가? 만족과 보람은 충분히 느끼는가?


사실 나는 그 질문이 (욕망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질문’이란 걸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인간이고 인간에게는 생각이라는 게 있다. ‘왜 사진을 찍는가?’ 라는 질문은 ‘욕망’이 아니라, 바로 그 ‘생각’에 대해 말해 보라는 것이다. 사진찍기가 너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래서 결국 너의 목적은 무엇인지, 너는 결국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지, 그런 대답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 철학적 문제들이 어려운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신성하거나 환원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거나 현실적인 과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호모사피엔스의 마음에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인지적 장비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유기체이고, 우리의 마음은 진리로 통하는 파이프라인이 아니라 생물학적 기관이다. 우리의 마음은 조상들의 생사를 좌우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지, 정확함을 벗 삼기 위해서나 온갖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다.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질문 앞에서 난감해지는 것은 질문이 자기욕망에 대한 자기 관점을 묻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왜 사진을 찍느냐?’ 질문의 요지만 빼내 보면 ‘너의 욕망이 왜 그것을 욕망한다고 너는 생각하느냐?’가 된다. ‘왜 사느냐?’ ‘왜 먹느냐?’ 는 물음처럼, 자기욕망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나는 내 욕망이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지만, 그것은 철학적 문제이고 설명하기 어렵다. ‘왜 찍느냐?’는 질문을 ‘왜 사느냐?’는 물음에 빗대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공통점 때문인 지도 모른다. 둘 다 의미를 묻고 있지만, 우리는 마땅히 할 수 있는 대답이 없다.




[ 뭔가를 느끼게 하는 사진입니다. 명치에 뭔가 쿵 하고 떨어지게 하는 사진이 변화를 위한 촉매제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전의 양상을 바꿨던 그 전쟁사진들처럼요. 가끔은 그 무언가를 강력하게 상징하는 순간 자체가 그 무언가보다 더 커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크리스 라이니어의 인터뷰.) (크리스 오르위그. 소울포토 p230) ]


사실 먼저 질문을 받았던, 많은 사진가들이 그 어려운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책을 통해 그것들을 읽을 수 있다. 사회문화적 이유에서 기록을 남기려고.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거나 불의나 불평등을 폭로하기 위해.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그림으로 그리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감정을 표현해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식을 주기 위해. 새로운 시각적 관점을 발견하고 보여 줌으로써, 문화 발전을 기하고,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 위해. 카메라가 어떤 그림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서.


어떤 대답은 욕망을 토로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그럴듯한 대답들도 많이 있다. 나는 대답들이 진열된 문을 열고, 그 중 쓸 만한 걸 하나 꺼내서 내 것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설마하니 내가 책 속의 사람들보다 더 나은 가치나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을까? 책이란 그래서 쓸모 있다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건 내 문제이고, 그런 건 옳은 해결 방식이 아니다.


‘무슨 의미가 있기에 너는 사진을 찍느냐?‘


그 답은 그런 방식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대답은 내가 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는 좀처럼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쇼핑몰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선택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 애당초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답이 미리 정해져서 어딘가에 놓여 있지는 않은 것이다.


신해철이 말했다. 신작을 낼 때는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거야’ 하며 들뜨고 흥분했다. 그러나 발표 후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곡을 썼을까?’하고 도무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다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몸살을 앓았다. 그의 신곡은 단순히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였고 새로운 ‘음악’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 사건이 있기 전에 나는 신해철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도 몰랐다. 텔레비전 프로에서 그를 보고 ‘가수치고는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가 죽은 뒤에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평가가 흘러나왔고, 비로소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고루한 편이라, 전위적인 색채가 있는 예술에는 잘 반응하지 못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체질적으로 불편해서 즐길 수가 없다. 새로운 게 나타나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석해서 파악하려고 머리부터 작동하는 타입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 내가 공감을 하든 못하든, 지금 나는 신해철이 어떤 음악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완성된 신해철이 들어 있다. 그는 죽었고, 그의 죽음으로서 그의 삶도 음악도 완성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그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계속해서 변화했을 것이고, 지금의 그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나이가 더 들었을 때, 나 같은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편안한 음악을 만들어 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로버트 카파]는 ‘왜 찍느냐?‘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사진을 찍었던 사진가처럼 보인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었을 것이고, 그에 부응 하는 성과를 얻어서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아마 그가 처음부터 그런 사명감으로 사진을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진을 찍었고, 그가 찍은 사진으로 인한 세상의 반응과 사회적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결국에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답'은 그의 '행동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나는 사진이다.


사진이 곧 삶이며 자기 전부라는 식의 그런 확신과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사진이 대체 뭐라고, 거기 자기 삶을 전부 내던질 수 있다는 걸까? 다들 그렇게 확신에 차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랬다가 혹시 그게 (밥벌이가 아니었더라면) 그저 하잘것없는 그림조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나만 흔들리는 걸까?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답을 알고 있거나 확신에 차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들 긍정의 메시지를 속으로 되뇌면서, 자기최면에 빠지려고 기를 쓰는 것뿐이다. 회의와 불확실성에 항복해서 무의미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음악만이 자신을 치유한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으며 음악을 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고 자기 자아를 찾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아마 그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음악을 통해서 자기 존재 의미를 찾았을 것이고, 음악 때문에 남들이 자기 존재를 알아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자아실현과 사회적 성공의 수단으로 음악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음악만이 그를 치유할 수 있다면 음악을 그만둘 수는 없는 문제다. ‘의미’는 만들어져 가는 것이고, 변화하는 성질을 가졌고, 그래서 불신과 의심에 흔들리다가 마침내 자리 잡아 완성되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왜 사진을 찍는가?'


사실 그것은 철학적 질문이고, 답을 내기보다는, 원래 질문을 다양하게 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이 그림일까?

사진은 언어일까? 왜 언어일까?

나는 왜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는 어떻게 생겨나거나 부여하는 것일까?


질문을 다양한 형태로 하다 보면, 답에 조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욕망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의미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마련이다. 의미를 다져가는 과정이 곧 그의 사진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 즐거움만 먹고 살 수 없듯이 의미에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좋은 의미를 찾았다고 해서 열정이 불타오른다는 법도 없다.




나는 내가  사진을 찍는지 알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잔꾀를 부려, 얼버무리려는 말로 들리겠지만, 그냥 사실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알고 있는 걸 종이 위에 옮겨 적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쓰는 경우가 더 많다. 사진을 찍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실은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사진을 찍다 보면, 같은 질문을 무수히 반복하게 될 것이고, 그 때 좀 더 나은, 다른 이유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볼 때마다 강한 충동을 느낀다. 블로그를 당장 폭파하고, 내일부터 새로운 사진과 새로운 글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떨까? 전에 만들었던 홈페이지에서 블로그로 옮겨올 때도 그런 생각이 작용했던 것 같다. 전에 쓴 글들이 유치해서 견딜 수 없었고, 의기양양해 했던 사진들은 시시해서 봐 주기 민망했다. 어떤 글과 사진은 거의 감추고 싶은 치부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제 찍은 사진이 오늘 시시하게 보인다면 어쨌든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전에 쓴 글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동안 내가 좀 더 똑똑해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어쨌거나, 아마추어 사진가의 현실적인 문제는 ‘흥미와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이다. 밥벌이도 아닌, 어떤 일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할 때도 나는 매번 다른 길로 다니려고 애를 쓴다. 넓지 않은 아파트 단지 내의 통로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고만고만한 산책경로조차, 매일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하루는 이리 가면 다른 날은 저 길로 가고 싶어진다. 인간은 지루함을 잘 참지 못하고 진부함은 우리 최대의 적이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해서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대상과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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