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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Dec 06. 2023

말없는 존재들

식물원 온실에서...

온실 안은 따뜻하고 습했다.

넓지 않은 공간에 낯선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푯말에 쓰인 기묘한 식물 이름들을 되뇌면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뷰파인더 안이 희뿌옇게 보였다.

카메라를 거꾸로 들고 렌즈후드 안을 들여다보았다.

컴컴한 구멍 안에 습기 찬 유리알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마치 소프트 필터를 끼운 것 같았다.

습기를 닦지 않고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한택식물원 호주온실에서


사진찍기는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수반하는 것 같다.

나는 사람이 북적대는 장소에서도 늘 혼자라는 느낌으로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나와 세상 사이에 놓인 벽이고, 나는 렌즈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세상을 보지만, 내가 보는 세상은 말이 없다.

세상은 나의 존재를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혹은 알더라도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사진의 세계에서는 사진가가 주체이고 피사체는 대상이며 객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객체는 ‘작용의 대상’이 될 뿐, 스스로 뭘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외로움은 몹쓸 감정이다.

슬픔이나 공포는 불안과 긴장을 정화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분노의 감정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열정이나 욕망이 숨어있다.

하지만 외로움은 거의 절망적이다.

그것은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 중 가장 사악한 감정이며 어떤 위안도 없는 극한의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대답 없는 풍경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는 일이 늘 버겁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이 생각난다.

그녀의 책이 다 그렇듯이 <오후 네 시>는 200페이지가 안 되는 짧은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말없는 존재'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지 보여준다.

말이 없는 피사체들은 사진가를 얼마나 외롭게 만드는가?

그것들은 늘 스스로 입을 다물어서, 내가 나 자신을 향해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런 질문들은 답이 없고, 헛되고, 결국 사람을 절망의 나락으로 이끈다.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 시)]

  

노부부가 한적한 시골에 집을 마련했다.

남편 <에밀>은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내 <쥘리에트>와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꿈을 꾸었고, 65세가 되어 은퇴하면서, 마침내 동화 같은 그 꿈이 실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부부의 유일한 이웃인 앞집 남자가 매일 오후 네 시에 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전직 의사인 <베르나르댕>씨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시며 정확하게 두 시간 머물다가 돌아갔고, 그 일은 매일 반복되었다.

그가 왜 매일같이 방문하는지, 그리고 두 시간씩이나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평소 늘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고, 질문을 하면 그저 모든 것이 귀찮고 성가시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릴 뿐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베르나르댕>씨는 엄청난 비만증 환자로 오로지 먹고 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의 아내를 돌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에밀>은 그가 삶에 지친 나머지 인생의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일 뿐 정작 당사자에게서는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가?

남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이고, 오직 이 거울을 통해서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상대를 탐색하던 우리 관심의 화살촉이 곧장 나를 향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


하지만 거울 없이 알 수 있는 건 없고, 우리는 곧장 ‘자아정체성 혼란’이라는 인생 최악의 곤경에 빠진다.

남편 <에밀>은 교양 있고, 남들과 대화하기 좋아하며, 손님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예’ ‘아니오’ 식의 간단한 대답 외에 대화가 되지 않는 손님을 두 시간씩 상대하는 일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두 부부는 매일 오후 네 시로 예고된 그 고통에 한없이 예민해져 갔으며, 마침내 모든 일상이 그 일에 지배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동화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블랙코미디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교양 있고 학식이 풍부한 훌륭한 인격체인(자기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었던) <에밀>은 마침내 그의 성가신 이웃인 <베르나르댕>씨를 살해한다.


[꽃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 후 나는 가련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지닌 등꽃의 절규가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애원이었다. 담을 타고 올라가는 등나무의 모양은 여왕의 옷자락에 매달리는 사람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눈물 섞인 한탄처럼 떨어져 내리는 푸른 꽃송이, 그 협박 섞인 탄원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인생은 긴 한탄, 끝나지 않는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오>. 나 스스로 내가 내린 결정을 아무리 반박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살아 있을 이유, 그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같은 책 p179)]

    

<베르나르댕>씨의 침묵과 그의 불행해 보이는 삶 그리고 권태롭고 무관심한 태도가 결국, 힘겹게 그를 상대하던 <에밀>의 본능 속에 숨은 '하이드'를 끄집어낸 것이다.



소설은 <에밀>이 이렇게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     


뷰파인더 안의 풍경도 소설 속 이웃처럼 말이 없다.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풍경을 상대하다 보면, 생각의 화살촉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다.

끝도 없는 질문이 떠오르고, 질문은 외로움만 가중시킨다.

찬란한 꽃송이 앞에서 조차, 나는 그만 깊은 절망에 빠진다.     

겨울철이라 식물원에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밖은 온통 마른 풀잎으로 뒤덮인 삭막한 풍경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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