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디 Jan 10. 2024

사진은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을까?

조안 B. 시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부 메이벌은 그녀가 설거지한 그릇에 의해 기억되지 않는다. (조안 B. 시울라, 일의 발견)’     


그렇다면...


사진가는 그가 찍은 사진에 의해 기억될 수 있을까?


명동


내 사진동무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거나 사진은 아름다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느닷없긴 했지만, 자기 생각과 다르게, 평소 내가 아름다운 사진을 폄하하는 듯이 보이는 말을 자주 한 탓이었을 것이다. 혹은 내가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사진을 동호회 갤러리에 버젓이 올리는 걸 보고 지레 그러리라고, 짐작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래서 내심 반박하고 싶었을 것이고, 마침 나를 만났을 때, 말이 입 밖에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사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사진가와 별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살짝 비친 것뿐이다.

     

사진의 아름다움이 피사체의 아름다움에 매우 의존적이며, 대상이 놓인 주변 환경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 아닌가? 모델이 아름다워야 사진이 아름다울 수 있고, 풍경이 뛰어나야 사진도 훌륭할 수 있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그곳 풍경이 그토록 아름다웠으며, 그 순간 빛이 좋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카메라가 렌즈 앞의 장면을 멋지게 그려내는 탁월한 기능을 가졌다는 점에 대해, 내가 그렇게까지 자부심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진을 (그 자체만으로) 온전한 자기 창작물로 여기면서, 스스로 예술가연하는 사진가들을 볼 때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체력이 좋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이 없고, 다소 자유로운 기질을 가졌으며 시간여유도 많았던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감각이 뛰어났고, 미에 대한 탐구의 열정이 넘쳤으며, 카메라와 같은 전자장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좋은 사진장비를 갖추고는 자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장소에 찾아가서 멋진 사진을 찍어왔다. 저녁에 일기예보를 보고, 이튿날 날씨를 가늠하면서, 산에 올라가서 비박을 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운해가 산봉우리를 타고 넘어가는 멋진 장관을 촬영했다.

     

야생화를 좋아해서, 계절마다 군락지로 찾아다니면서 아름다운 야생화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다중노출 기능을 이용해서 흐르는 강물이 찍힌 배경사진 위에 꽃을 겹쳐 찍어서 환상적인 느낌의 사진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수시로 차를 몰아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에 가서, 개펄에 물이 드나드는 장면을 장 노출로 촬영했다. 흐르는 물결에 풍경의 디테일이 대부분 사라지고, 배나 그물망과 같은, 정지된 사물들의 흔적만 남았다. 단순하고 간결한 선으로 묘사된, 일종의 ‘미니멀 사진’이 되었다. 간혹 중국 ‘패상‘이나 미국의 ‘엔텔로프 캐년‘ 같은 유명 촬영지에 가서 이색적인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기도 했다.

     

근래에는 드론을 이용해서 꼬불꼬불한 다랑논이 리드미컬하게 펼쳐진 남해의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촬영해왔다. 고인 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거울처럼 반짝이는 바람에 수많은 논두렁이 멋진 패턴을 형성해서 풍경은 장관을 이루었다. 그는 그 사진들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고, 사진을 본 사람들은 풍경과 사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의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나는 공들여 촬영한 그 사진들 옆에 내 사진을 올릴 때면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사진은 주로 일상의 공간에서 찍은 조촐한 사진으로, 볼품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노력과 비용이 별로 들어가지 않아 ‘무성의하다’고 볼 수도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혹시 그 때문에 내 마음 속에서 ‘아름다우면 대수냐?’는 식의 자격지심 같은 게 자라나게 된 것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어떤 예술은 마치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외한의 눈에는 예술성이 강할수록,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작품일수록, 더욱 아름다움과는 상관없는 듯이 보이는 경향도 강한 것 같다. 심지어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일부 예술작품들은, 마치 작가가 ‘자기작품이 아름다운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반항적 예술 사조를 띤 작품들과 모더니즘 예술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사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는 것 같다.

     

사진이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를 두고 다소 논란도 있지만, 사진가들의 마인드는 예술가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고, 사진가들도 대부분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사진이 곧 좋은 사진’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세간에서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사진들을 보면, 솜씨 좋은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인터넷에 올린, 흔한 풍경사진보다 훨씬 덜 아름답게 보인다. 도대체 그 사진들이 왜 훌륭하다는 걸까? 

    

그래서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혹시... 사진은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물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그건 아니다. 사진은 아름다워야 한다.'     


예술가도 아니고 미학자도 아니지만, (눈치로)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예술’ 혹은 예술의 냄새를 풍기는 ‘유사 예술’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술을 정의하고 다루는 학문의 명칭도 ‘미학(美學)’ 아닌가. 따라서 (순수예술로서의 사진이라면) 사진도 당연히 아름다워야만 한다. 하지만 전제가 하나있는데, 그건 바로 ‘새로움’이다. 만약 새롭지 않다면, 아무리 아름다워도 별 의미가 없다.     

     



어느 분야에서든 ‘새로움’이야말로 가치평가에 있어서 첫 번째 조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너무 많은 ‘아류(亞流)’들이 판을 치게 된다. 오리지널보다, 모사하고 표절하고 흉내를 낸 것들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한다면 그건 옳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특히 예술의 세계에서 ‘진부함’은 최대의 적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진부함을 벗어나 (이미 발굴되거나 발표된 것이 아닌)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애를 쓴다. 새로운 걸 창안하는 것만 해도 힘든데 그 결과물이 다른 것들보다 아름답기까지 해야 하니, 창작활동은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

     

그래서 내 생각에, 만약 어떤 예술작품이 별로 아름답지 않게 보인다면, ‘진부함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결과‘라고 보고, 다소 양해를 해 줄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새롭지 않아도 된다면, 아마 그는 얼마든지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름다움’만이 절대적인 가치는 아닌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추어사진가의 아름다운 사진은 일부 전문가들 사진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새롭지는 않기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말을 할 수 있겠다.

     


좋은 예술작품이 별로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것은, 실제로 매우 아름답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쉽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눈은 뇌의 연장이고 뇌는 새로운 걸 보면 어리둥절해 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예술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고흐>나 <모네>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요즘 같아서는 믿기 힘들다.

     

그림이나 사진을 볼 때, 처음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기관은 시각(視覺)이고, 시각은 뇌의 기능이며, 뇌는 학습을 통해서 변한다.     


"이게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그러나 어제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오늘은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훌륭한 예술은 선구적인 역할을 해서, 우리에게 미(美)를 감지하는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전에는 아름답지 않았던 것들을 예술을 통해서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감각기관이 세련되지 않아서, 지금은 볼 수 없는 아름다움도 존재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차이는 미에 대한 개개인의 취향에도 반영이 될 것이다.     


그 밖에 사진만이 갖는 고유한 환경적 특성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기록과 증명을 위한 사진들, 즉 애초에 예술과 무관해 보이는 사진들이 순수(예술)사진과 뒤섞이면서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진의 주류가 분명 순수예술사진은 아닌 것 같다. 사진 분야가 사진기술을 이용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다보니 그렇게 된 측면도 있다는 얘기다. 사진집을 내고 사진 관련 에세이를 출판하는 사진가 중에 보도나 상업사진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은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보도사진가나 상업사진가나 일부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서 중요한 건 ‘메시지’인 때문에, ‘메시지’를 위해서라면 ‘아름다움’은 희생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렇게 처음부터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았던 사진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분들이 예술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자꾸 이러쿵저러쿵 어떤 말들을 하는 바람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사진 분야에서 유난히도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보도사진을 찍는 사진기자가 자기 사진이 실린 책에서 '(사진)예술'을 언급하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 사진을 예술작품과 연결 지으려는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고는 혼란에 빠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비록 사진을 찍는 그 분의 마인드가 '예술적'일지언정, 그 사진(사진 그 자체)이 '예술작품'인 건 아닐 것이다.

  

상업적 목적에서 사진을 찍는 광고사진가나 여러 형태의 상업사진가들 또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등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서 아름다움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미에 대한 관점도 달라졌고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예술의 범주가 확장되었다. 그래서 사진이 시대를 앞서 가다보니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요즘은 플로리스트나 제빵사가 예술적 고뇌에 빠진다고 해도, 별로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아름다움만을 절대적 가치로 보기에 곤란한,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조안 B. 시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가정부 메이벌은 그녀가 설거지한 그릇에 의해 기억되지 않는다. (조안 B. 시울라. 일의 발견) ’     


그렇다면...     


‘사진가는 그가 찍은 사진에 의해 기억될 수 있을까?’     


‘일’에도 성격이 있다. 어떤 일은 ‘창조적‘이며, 그 결과물은 ‘창작물‘이고, 일을 한 그 사람의 ‘작품’이 된다. 창작자는 당연히, 자기가 만든 작품을 통해서 기억될 것이다. 사진가도 이 경우에 해당될 수 있을까? 사실 독창성을 이야기할 때, 사진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아류(亞流)’란 ‘독창성이 없이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사진은 ‘다른 사진의 아류’가 되기 쉬울 뿐 아니라 자칫하면, ‘온 세상의 아류’로 비칠 위험도 있다.  

   

그러니까 사진은 중복되기 쉬우며, 심지어 어떤 사진은 '자연풍경의 아류'나 '세계의 아류'로 보이기 쉽다는 얘기다. 그건 물론 '자동화된 기계장치를 써서 찍어내는 식'의 고유한 제작방식이 빚어낸 구조적인 문제일 뿐, 사진가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을 써서 창의성을 드러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사진가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저 베껴서 옮겼을 뿐, ‘특별히 가치 있는 일을 한 게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단지 (창작을 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너무 좁다’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뿐이다. 

    


사진의 아름다움은 앵글과 프레임을 다루는 문제와 같은 감각적인 사진기술과 사진가가 경험으로 터득한 빛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을 통해 사진에 나타날 수 있다. 그의 기술과 감각이 아니었다면, 사진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삼각대를 펼치고, 렌즈 앞에 필터를 끼우고, 적당한 곳에 초점을 맞추고, 좋은 노출 값을 설정했으며, 긴 시간 기다린 끝에 그 아름다운 사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 일은 기를 쓰고 멋진 피사체와 대면하려고 시도하는, 사진가의 무모한 열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사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런 기술과 노력에 대한 부분이 독창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 고유한 제작방식 때문에, 사진은 근본적으로 '아류'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사진을 찍는 대부분의 기술과 방법들이 중복이거나 반복되며, 늘 피사체와 대상이 지닌 환경조건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진은 과거 사진의 재탕이고, 모든 사진은 진부하다’는 식의, 절망적인 시각도 존재하는 것 같다.     

    



사진가가 늘 마주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가 하나 있다.     


‘의미를 담을까 형식미를 취할까?’     


의미를 담자니 형식미를 해치고, 형식미에 치중하자니 의미가 잘 담기지 않는 건 사진가라면 일상적으로 겪는 경험일 것이다. 문제는 사진을 일반적인 예술작품처럼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특히 사진을 회화처럼 바라보고, 그림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려는 태도가 혼란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진은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은 아닌 것 같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회화가 추구하는 것은 ‘형식미’다. 그림의 ‘의미’도 대부분 거기서(형식에서) 파생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 형식미를 중시하는 입장은 (창의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 '형식이 과연 사진가가 창조한 게 맞는가?' 하는 식의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당신이 만든 거야?"     


사진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관람자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온전한 창작물'은 아니다.      


그래서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사진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렇다면 중요한 건 사진에 담긴 ‘메시지’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메시지는 사진을 일종의 언어나 기호로 볼 때, 거기서 읽히는 ‘내용’을 말한다. 사진가가 (메시지가 담긴) 피사체를 직접 만들어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피사체를 찍는다. 후자의 경우, 사진의 메시지는 주로 사진가가 창작한 게 아니라 원래 피사체에 담겨있던 것이다. 그건 성질상, ‘예술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그 때의 메시지는 창작된 게 아니며, (가리키는 것이 명백해서) 해석이나 상상력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밖에 (메시지를 전할 목적으로) 사진가가 피사체를 직접 만들거나 특정한 피사체를 골라서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순수 예술사진에서 흔하게 행해지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사진가가 메시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사진은 '아름다움'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건 단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그런 방식들이 본질을 너무 많이 벗어난 것 같다. '그건 예술이 아니지 않느냐!'는 질책에, 예술이 되고 싶은 나머지, 요리조리 피하다가 엉뚱한 구덩이에 빠져버린 것만 같다. 여기서 애당초 '사진(예술)에 왜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삶에 위안을 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게 예술이라면, '아름다움에서 멀어지면 예술에서도 멀어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나도 '사진은 아름다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류’를 벗어나 새로운 걸 추구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약간 느낀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기도 한다. 물론 별 소득은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부분인 것 같다. 아름다움만 보지 않고, '독창성'이란 문제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사진을 통해서 느끼는 만족과 의미를 조금 다른 데서 찾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사진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찍는다거나 내 사진이 새롭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다만 사진에서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니라는 인식이 주는 이익은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내가 그렇듯이, 남들만큼 아름다운 사진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경우, 아쉬움을 덜고 위안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또는 무모한 열정을 다스려서, 약간 더 영리하게 처신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사진가는 사진으로 기억되기보다는, 그가 한 행위에 의해 기억되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말없는 존재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